여름으로 접어들기 직전의 더운 봄날, 낯선 길로 접어들었다. 어느 대학교 앞의 하천과 허름한 건물들 사이로 난 골목의 풍경이 문득 궁금했다. 집들은 작고 낡았다. 쪽방처럼 보이는 3-4평 남짓한 작은 공간과 아직은 정비가 되지 않은 하천은 파리의 세느 강변처럼 낭만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시 수변의 가장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매력이 곳곳에 있었다. 가장 오래 발길을 멈추었던 장소는 지나가기도 불편할 정도로 화분이 가득 놓인 어느 집 앞이었다. 어쩌면 집안보다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화분의 정원에 진귀한 꽃들은 없었지만 저마다의 강렬한 색과 생명을 자랑하고 있었다.  
 
대학교와 국립연구소, 지하철역, 상대적으로 부족한 상권, 그리고 수변 공간. 만일 센스 있는 개발업자가 가능성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이 가로는 몇 년 안에 삼청동, 연남동, 경리단길처럼 핫플레이스로 변신할 가능성이 있다. 모서리의 과일가게는 커피숍으로 바뀔 것이며 쪽방촌의 고단한 삶은 다른 곳을 찾아 떠나가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화분의 정원도 사라질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하는 서울의 곳곳에서 나타나는 숙명적인 현상. 사실 젠트리피케이션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도시의 쇠락한 공간이 좋아진다는 점은 분명하기에. 하지만 그 대가로 누추하다할지라도 화분의 꽃처럼 생기 있게 살아있음을 노래하던 동네의 오래된 삶은 사라진다.     
 
한 때 게릴라 가드닝이 화제가 됐다. 게릴라 가드닝은 도시의 방치된 공간을 작은 정원으로 꾸미는 이벤트다. 런던의 한 젊은이가 동네의 허름한 공간을 찾아서 꽃을 심으면서 이벤트는 세계적인 운동으로 확산됐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게릴라 가드닝은 불법이다. 꽃을 심은 공간은 아무리 방치되어있더라도 누군가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1973년 리즈 크리스티는 ‘녹색 게릴라’라는 단체를 조직해 뉴욕의 곳곳에 봉쇄돼 있던 빈 땅에 침입해 정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당장 뉴욕시는 이를 불법행위로 규정하고 정원들을 폐쇄했다. 동네를 아름답게 바꾸고자하는 행위는 불법이고, 동네의 환경을 열악하게 만드는 무관심은 합법인 상황에 대해 사람들은 항의했다. 그리고 도심의 정원 가꾸기는 저항적 사회운동으로 발전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서울에 세련된 브런치 집과 편집샵이 만들어내는 명소들이 많이 생겨 관광객들이 감탄하고 주말에 허세를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이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동네가 사라지고 그곳에 담긴 삶이 어디론가 떠나야한다는 사실이 조금 서글프다면, 그래서, 혹시라도 공간을 전횡하는 힘에 작은 저항을 하고 싶다면, 꽃을 심자. 물론 자본과 개발의 논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꽃 따위는 쉽게 짓밟아버릴 수가 있다. 그래도, 그러한 논리일지도 꽃 앞에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꽃이 있는 동네는 더 이상 물신화된 상품으로서의 공간의 집합체가 아니라 살아가는 터전이라고 무언의 소리로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쓸데없어 보이는 연약한 아름다움과 낭만이 가장 강력한 외침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동네에서 꽃을 가꾼다는 저항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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