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매체가 선정적인 이미지와 기호들로 대중의 욕망을 채워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비자의 체면을 지켜주는 선에서만 소비될 수 있었다. 아이유의 ‘제제’는 소비자의 체면을 지켜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성폭력에 대해 분노하는 정서가 바탕이 된 사회에서 급기야 수많은 이들이 ‘제제’에 대해 윤리적인 단죄에 나서게 되는 결과까지 초래했다.

다만 대부분의 경우 ‘제제’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소아에 대한 성적 폭력의 정서적 반감에 머물렀다. 그러나 예술에서 소아성애적 코드가 금지되어야 하는 근거에 대한 설명은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로리타』는 되고 아이유의 ‘제제’는 왜 안되느냐는 항변이 나온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술에서의 소아성애적 코드 자체가, 폭력의 대상이 되었거나 될지 모를 피해자에게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한 문제의식에는 필자 또한 공감한다. 다만 예술에서 문제 삼을 수 있는 부분은 소아성애적 코드가 폭력적인 시선으로 다루어졌을 경우로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럴 경우에만 비슷한 코드를 소재로 한 『로리타』와 같은 소설이나, <레옹>과 같은 영화가 다른 어떤 부당한 작품들과는 다르다고 설명할 수 있다. 어떤 작품의 윤리성에 관한 논쟁은 다양한 해석을 자양분으로 하는 사회적 토양에서만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작품은 시장에 내놓아진 상품처럼 소비자의 자유로운 판단과 선택에 의해 사랑받거나 비판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희민(경제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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