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물관 벽에 그려진 피해자들이 손을 맞잡은 그림과 방문객들이 남긴 메시지
우리나라 현대사를 가장 잘 나타내는 ‘기억의 터’는 무엇일까. 서대문형무소, 조선총독부 등 여러 대답이 나올 수 있지만 최근 가장 주목받는 것은 위안부 소녀상이다. 위안부 소녀상은 지난 2011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수요집회 1000회가 열린 날부터 일본 대사관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위안부 소녀상은 이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운동의 상징이 됐다.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퍼져나가던 위안부 소녀상은 제주도를 넘어 중국과 미국에도 세워졌다.

피해자가 바라보는 기억의 터

지난 1990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이 결성되고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첫 증언을 하며 시작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운동은 이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규모도 커지고 이슈화 됐다. 당시 증언을 하던 김학순 할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같이 증언해줄 사람이 한 명만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다.

가해자는 절대로 문제를 크게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문제를 이슈화 시키는 것은 피해자의 몫이다. 사람들이 외면하거나 잊지 않도록 내가 언제, 어떻게 피해를 당했는지를 끊임없이 외치고 기록해야 한다. 냉혹한 현실이다. 기억의 터를 만드는 것 역시 피해자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유대인들은 독일에 유대인 박물관,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짓는 등 끊임없이 기억의 터를 만들었다. 문학과 영화 등 예술을 통해 홀로코스트를 다루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그 결과 유대인 홀로코스트하면 누구나 쉰들러 리스트, 인생은 아름다워, 피아니스트 등 여러 영화 제목 한 두 개쯤은 떠올릴 수 있을 정도가 됐다. 문학적으로도 안네의 일기부터 시작해 만화책으로는 유일하게 퓰리처상을 수상한 ‘쥐’ 까지 수많은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를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으로 만들고 주목받게 하고 있다.

가해자가 바라보는 기억의 터

‘쥐’에서는 고양이로 그려진 독일인에게 쥐로 그려진 유대인들이 고통 받았다는 것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해자가 악하다고 해서 피해자가 무조건 선한 것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작중에 나치에 의해 수용소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었음에도 흑인을 차에 태우기 싫어하는 아버지의 이중적인 모습이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혐오하고 존재를 부정하는 것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다.

기억의 터는 피해자의 아픈 기억을 담은 대상으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범위를 넓혀 간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기억의 터가 있다. 바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억하기 위해 정대협에서 지난 2012년에 개관했다. 박물관 이름이 일본군 위안부 박물관이 아니라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인 이유는 이 박물관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지금도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전시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물관 1층 상설관의 테마는 세계분쟁과 여성폭력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그 속에서 성적 학대를 당하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기획전시실에는 베트남 전쟁 때 한국군에 의해 성폭행당한 베트남 여성들의 이야기도 담고 있다. “전쟁은 여지없이 여성들을 유린했고 그 가해자는 대한민국이었다”는 설명은 일본에게 피해자였던 우리나라가 베트남에게 가해자가 된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에는 베트남 여성 피해자들을 위한 기억의 터가 부족하다. 참전 군인들을 위한 추모비와 기념비만 세워졌을 뿐이다. 하지만 베트남 곳곳에는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는 내용이 새겨진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져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지난 2012년 나비기금을 만들었다. 나비기금은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지원하는 기금으로 지원 대상에는 한국군에게 성폭행 당한 베트남 여성들도 포함돼 있다. 김복동 할머니와 길원옥 할머니는 일본정부로부터 법적 배상을 받으면 전액을 나비기금에 기부하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전쟁 속에서 항상 피해자일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스스로 기억의 터를 만들어 가고 있다.


글·사진_ 윤진호 기자 jhyoon2007@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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