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대신문은 지난겨울방학 동안 독일 일대를 취재하며 대한민국의 사회문제를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했다. 위안부 문제에 이어 뉴스탐사가 두 번째로 다룰 주제는 홀로코스트 문화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자신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사죄하기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이어왔다. 다카우 수용소, Topographie des Terrors, 유대인 박물관을 지나며 과거를 반성하고 기억하려는 독일인들을 만나봤다. 그들의 과거·현재·미래는 어디로 흐르고 있을까. -편집자주-

▲ 다카우 수용소 | 박소은 기자

독일 뉘른베르크에 위치한 나치전당대회 기록 보관소를 돌아보던 중이었다. 한쪽에서 갑자기 큰 울음소리가 났다. 아직 초등학교에도 입학하지 않았을법한 어린 아이가 울음을 터트린 것이었다. 아이의 부모는 당연하다는 듯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전시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나치전당대회 기록 보관소에 담긴 메시지가 무엇이기에 아이가 눈물을 보인 것일까.

기억의 터, 정체성의 기록

뉘른베르크에서 거주중이라는 Jesse 씨와 James 씨는 아이가 다소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답했다. Jesse 씨는 “아이가 어려 아직 학교에서 과거 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배우지 않았다”며 “집이 근처기도 하고 미리 알려주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같이 나왔다”고 말했다. 아이가 우는 모습을 함께 바라보며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덧붙이자 부부는 그저 어쩔 수 없다며 웃었다.

부부의 방문은 프랑스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가 제시한 ‘기억의 터’라는 개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기억의 터란 민족적 기억이 구체화돼 뚜렷한 상징물로 남게된 장소·국가·인물 등을 모두 지칭하는 개념이다. 기억의 터는 개인들로 하여금 일체감을 유발하고 타 집단과 구별되는 기호를 갖게 한다. 1938년 독일 전역에서 발생한 ‘크리스탈 나흐트’ 사건이 이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나치당은 독일 외교관이 폴란드계 유대인에 의해 저격당했다고 주장하며 나치 폭도들로 하여금 유대인들에게 무분별한 폭력을 가하게 만들었다. 이에 폭도들은 유대인의 집과 사업장뿐 아니라 시너고그를 습격했다. 시너고그가 유대교에서 집회와 예배의 장소로 쓰이는 중요한 종교적 건축물이라는 점, 이후 발견된 문서에서 유대인 사회를 무너뜨리려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나치당이 이 사건을 기획했다는 점에서 기억의 터를 파괴해 유대인을 복속시키고자 했던 의도가 드러난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후 독일인들의 대처다. 대부분이 파괴되고 전소된 시너고그는 전후 디자인 박물관으로, 다시 홀로코스트 기념관으로 재탄생했다. 나치전당대회 기록 보관소도 마찬가지다. 겉보기에 일반 전시관과 다를 바 없지만 그 역사를 들여다보면 다소 섬뜩하다. 나치전당대회 기록 보관소는 원래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유대인 탄압을 가속화하기 위해 전당대회장을 짓던 장소다. 하지만 건물을 짓는 도중 2차 세계대전이 끝났고, 독일인들은 남아있던 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해 나치의 만행에 대해 알리기로 했다. 홀로코스트 기념관이나 나치전당대회 기록 보관소는 과거 유대인을 억압하고 말살했던 집단의 정체성에서 탈피해 이를 반성하고 기억하겠다는 새로운 독일인들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하고 있다. 아마 아이가 울음을 터뜨린 이유도 이 기억의 터 속에 담긴 과거의 잔상을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의 터에 새겨진 적나라한 폭력들

과거를 반성하고 기억하겠다는 의지는 뉘른베르크뿐 아니라 독일 전역에 흐르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발해 시계 반대방향으로 독일을 여행하는 동안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고 반성하는 장소는 계속해서 등장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된 유대인 수용소를 보존하고 수용자들의 사진과 유품을 전시해 놓은 다카우 수용소, 나치 만행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고 전시한 Topographie des Terrors, 과거부터 현재까지 독일 유대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안내하는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하지만 만나는 독일인마다 입을 모아 ‘반성’과 ‘기억’을 말했다. 세 명의 아이를 데리고 다카우 수용소까지 두 시간을 넘게 달려 왔다는 Kelly 씨는 “아이들에게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고 무슨 일이 발생했었는지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며 “판단은 아이들의 몫이겠지만, 다만 이런 것들을 직접 마주하고 보고 느끼는 게 많았으면 했다”고 말했다. 연대기 순으로 구성된 박물관에는 산더미같이 쌓인 시체와 발바닥에 적힌 시체의 번호, 비쩍 말라 살가죽 위로 뼈가 드러난 사람들, 아침 점호에 시체를 끌고 나와야 했던 이야기가 가감없이 펼쳐져 있었다. 짐을 나르는 유대인을 비웃는 나치당원의 사진들과 고문의 상흔이 또렷한 유대인의 사진들 사이로 아이들이 쭈뼛거리며 돌아다녔다. 유난히 어둑어둑한 다카우 수용소 하늘을 배경으로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읽자 기분이 더욱 뒤숭숭해졌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박물관 맞은편에는 유대인들이 머물렀다던 숙소가 있었다. 30개가 넘던 숙소 중 복원된 숙소는 두 개에 불과하다는 설명을 읽으며 다닥다닥 붙은 삼층 침대, 한 방에 가득 들어찬 변기들을 둘러봤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고 머리가 밀린 채 여기서 웅크려 지냈을 누군가를 상상하며 숙소를 나오니 수로를 사이에 두고 작은 오두막집이 보였다. 오디오 가이드에서 이 수로는 수용소를 탈출하려던 유대인들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명이 흘러나왔다. 수로 중간중간 설치된 전망소에서 총을 쏴 유대인들의 도망을 막았다는 것이다. 유난히 반짝이며 흐르는 시냇물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작은 오두막집에는 가스실과 시체 소각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샤워를 한다며 유대인들을 데리고 와 가스를 살포해 한꺼번에 살인했다는 설명에 눈이 갔다. 그 옆의 시체 소각장도 그 뒤처리를 위해 쓰였다고 친절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 적나라함에 다카우 수용소에 더 머물러있기 힘들었다.

▲ 희생된 유대인들을 형상화한 동판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 전시)
과거·현재·미래의 터, 그리고 우리는

하지만 기억의 터를 찾은 독일인들은 이러한 적나라함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독일인들이 저질렀던 일들을 모두 목격했다는 Hartmut Brandau 씨는 열 번 이상 유대인 박물관을 방문했다며 “이 장소는 과거를 떠올리며 반성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기 아주 좋은 장소다. 2차 세계대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이에 대해 기억해야만 한다. 이 장소는 우리의 의무를 계속해서 되새기게 한다”고 말했다. Topographie des Terrors의 관계자 Jan uplegger 씨도 “사실 전쟁 이후 독일인들은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아했다. 하지만 이 장소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그 기억을 되새겨주는 장소기도 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처럼 과거의 역사를 목도하는 이도, 독일의 현재에서 살아가는 이도, 미래를 위해 아이들의 손을 잡은 이도 모두 기억의 터로 몰려들고 있다. 하지만 이 기억의 터를 둘러싼 것은 비단 독일인과 유대인만이 아니다. 기억의 터를 바라보던 각기 다른 색의 눈이 기억에 남는다. 독일에 남겨진 기억의 터를 각자의 역사에 비추어보는 것 아니었을까. 닮은 듯 닮지 않은 우리나라를 떠올리자 앞으로 우리나라는 어떻게 흘러갈지 복잡한 마음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글·사진_ 박소은 기자 thdms0108@uos.ac.kr
참고_ 로버트 베번, 나현영 역, 『집단 기억의 파괴』, 알마, 2012.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