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사당 현장 르포]

▲ 국회 정문에서 진행된 시민 필리버스터
▲ 필리버스터가 진행 중인 국회
대개 사람들은 국회의사당역을 자주 이용하진 않는다. 지난 1일 아침 9시 국회의사당 역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내렸다. 이어폰을 낀 대학생부터 나이 지긋한 노부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국회의사당 정문으로 향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필리버스터’를 방청하기 위해서다.
필리버스터는 장시간 발언을 통해 특정 안건에 대한 표결을 지연하거나 막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필리버스터의 정식 명칭은 ‘무제한 토론’으로 지난 2012년 신설된 「국회법」 제106조 2에 의거한 합법적 의사진행방해이다.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안(이하 테러방지법)’이 지난달 22일 발의됐다. 야당 의원들은 테러방지법이 ‘테러위험인물’을 모호하게 규정해 테러방지법이 무고한 시민들에게 오남용 될 것을 우려했다. 테러방지법이 규정하는 테러위험인물이란 테러 관련 활동을 하였거나, 하였다고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화 국회의장은 다음날인 23일 대한민국을 테러 위협으로 인한 국가비상상태로 판단하고 테러방지법을 직권 상정했다. 테러방지법이 입법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야당 의원들은 필리버스터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오후 7시 5분 첫 번째 필리버스터가 시작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필리버스터는 포털 실시간 검색어 1위가 됐다.

3월 1일, 필리버스터가 시작된 지 일주일째였다. 바로 전날 밤 ‘필리버스터 중단 결정’이라는 속보가 나왔다. 다들 언제 끝날지 모를 마지막 필리버스터를 방청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 했다.

국회 정문 앞에서 또랑또랑한 발표 소리가 들렸다. ‘시민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테러방지법 반대에 뜻을 모으며, 국회 정문 앞에서 그들 나름의 필리버스터를 진행하고 있었다. 시민 필리버스터를 조금 더 들어보고 싶었지만 당장 필리버스터가 중단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라 서둘러 국회로 향했다.

국회 본청 1층 로비에 들어서자 상당수의 시민들이 국회 출입을 위한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입장 순서를 기다리는 긴 줄도 있었다. 국회를 방청하기 위해서는 지역구 국회의원으로부터 국회 방청권을 받아야 한다. 국회의원 보좌관 A씨는 “저희 사무실에만 매일 50명의 시민들이 왔다. 약 300명이 앉을 수 있는 방청석이 꽉 차서, 방청을 기다리는 사람만 50명 정도 됐다”고 말했다.
방청을 거부 당한 시민도 있었다. A씨는 “방청석은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을 통해 받는 것이 원칙이다. 다른 지역구 시민이 지역구로부터 방청을 거부 당해 저희 사무실로 전화했다”며 “해당 지역구 국회의원 보좌관한테 전화했더니 막 짜증을 내더라.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도 아닌데 왜 해주냐면서”.

그의 말대로 국회 방청석은 사람들로 포화상태였다. 국회 방청석에는 가방 등의 소지품을 들고 들어갈 수 없다. 소지품을 보관하는 사물함은 이미 가득 찼다. 국회 경호원이 문 앞에 신문지를 깔고 국회 방청석에 들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방을 올려놨다. “오늘 마침 휴일이어서 그런지 방청석을 꽉 메워 주셨네요. 우리 교복 입은 여학생 분들도 보이시고요. 정말 고맙습니다.” 임수경 의원은 발언 중간 중간 방청석의 시민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방청석에는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 학생들과 같이 온 선생님, 교복을 입은 학생 등 온갖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시민들의 관심은 국회방청석에만 한정됐던 것은 아니었다. 국회방송 시청률은 20배 올랐다. 많은 시민들은 1인 미디어를 통해 필리버스터 중계를 지켜봤다. 필리버스터 중계를 예능 프로그램 이름에 빗댄 ‘마이 국회 텔레비전’이라는 말도 나왔다. 직접 국회 방청을 하러 온 송은미(51) 씨는 “지상파 어느 매체도 필리버스터를 하는 진짜 이유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며 직접 방청석을 찾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왜 이토록 많은 시민들이 필리버스터를 지켜봤을까. 국가정보기관으로부터 자행된 수많은 폭력의 사례가 상상 이상으로 충격적이어서일까, 가장 기본적이지만 잊고 살았던 인권의 가치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서일까. 어쩌면 그저 앞으로 두 번 다시없을 신기한 광경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저마다 이유는 다를 테다. 중요한 것은 모든 시민들이 묵묵히 필리버스터를 듣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수결이 민주주의의 모든 것이라면 참 간단하겠지만 민주주의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소수의견에 동의는 못할지언정 경청은 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국회의 발목을 잡지 말라고 역정을 낼 동안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본 뜻을 몸소 실천했다.

방청을 하던 시민들은 대부분 돌아갔다. 발 딛을 틈 없었던 방청석이 한산해졌다. 여전히 약 30명의 시민들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어났다. 외신 기자가 방청석에 들어와 세계최장시간을 기록하고 있는 필리버스터를 취재했다. 주변 기자들도 부쩍 많아졌다. 필리버스터 중단이 확정됐기 때문이다. 중단이 확정되자 의원들의 무제한 토론 내용도 달라졌다. 다들 발언 전 “이제 곧 테러방지법이 통과되겠지만…”이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일부 의원의 발언은 테러방지법에 대한 반대보다 ‘나를 지지해달라’는 선거운동에 가까웠다.

“우리 수사절차가 헌법의 영장주의를 명백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테러방지법 2조 8호에 보면 정보나 자료 수집 이것은 영장 없이도 할 수 있도록 돼 있습니다.” 자신에게 30분만 달라는 김관영 의원은 매우 짧은 시간 동안 테러방지법과 관련된 쟁점을 명쾌하게 정리했다. “이번 논쟁의 가장 근본적인 핵심은 ‘과연 국정원에게 테러방지를 위한 정보 수집 센터 역할을 맡길 수 있겠는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느냐 하는 점입니다.”

12시간 동안 계속 방청을 하니, 도저히 더는 못 있겠다 싶었다. 국회정문을 나서는데 다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테러방지법과 같이 법률에서 직접 위험들을 정하지 않고 대통령령에 포괄 위임하는 것은 헌법 상 정부 조직 법률주의와 포괄 위임 금지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국회 정문 앞에서는 아침에 봤던 시민 필리버스터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시민 필리버스터를 듣던 중년의 남성은 “그냥 일단 무턱대고 나왔는데…”라고 말꼬리를 흐린 채 한참을 서있었다. 몇몇 의원들이 필리버스터의 취지를 잊어가는 동안 시민들은 자리를 지켰다. 청년은 자신만의 필리버스터를 계속해서 이어갔다. “그래서 저는 못 막는다 하더라도 끝까지 이렇게라도 버틸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날 오후 7시 32분 필리버스터는 종료됐다. 찬성 157표, 반대 1표로 테러방지법은 통과됐다.


김태현 기자 taehyeon119@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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