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 뉴스탐사에서는 나치들이 유대인들에게 가했던 폭압을 어떻게 되새기고 반성하고 있는지 기억의 터를 통해 조명하고, 다하우 수용소, 토포그래피 데스 테로스(topographie des terrors), 유대인 박물관까지 독일인들의 사죄의 현장을 살펴봤다. 이번호 뉴스탐사에서는 그 피해자들 중 제대로 된 사과조차 받지 못한 소수자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이를 통해 국가 폭력에 의한 피해자들을 우리를 어떻게 기억해야할지 질문을 던져봤다.

뉘른베르크에 위치한 ‘체펠린 비행장’은 12개 이상의 축구 경기장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거대하다. 히틀러가 수십만 명의 관중들을 수용하기 위해 설계를 명령했다는 체펠린 비행장은 현재 간간히 바람을 쐬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썰렁하기만 했다. 도저히 나치를 향한 비정상적인 맹신이 터져 나왔을 것이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초라한 행색이었다. 히틀러가 군중을 내려다봤을 제단에 서서 비정상이 정상이었을 시대에 대해 곱씹었다.

▲ 왼쪽부터 나치 연설에 열광하는 군중들, 수염이 잘리는 유대인, 아랫쪽에 장애인 비난 포스터, 다하우 수용소에 수감된 동성애자
유대인에 가려진 ‘홀로코스트’ 희생자들

체펠린 비행장에 위치한 제단에 올라서니 이들이 끌려갔어야 했던 이유에 대해 어렴풋이 상상해볼 수 있었다. 나치전당대회 기록보관소에서 반복적으로 상영되던 열광적으로 연설하는 히틀러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하게 광활한 이 비행장에서 나치 국가는 교묘하게 대중을 활용해 나치 국가의 이상에 반하는 자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했다. 실제로 각종 기념관에서는 국가가 어떻게 숙적들을 제거해갔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홀로코스트’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나치의 학살을 떠올린다. 하지만 다하우 수용소와 토포그래피 데스 테로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에서 만난 피해자들은 유대인들에 국한되지 않았다. 나치당의 정치적 반대파,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소수 종교인들도 학살의 피해자기 때문이다.

나치 국가를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잡혀갔다. 나치당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통과하는 데 방해물로 여겨지는 숙적들을 마구잡이로 공격한 것이다. 나치에 반대하는 기자들, 작가들,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체펠린 비행장에서 공표된, ‘공동체에 해가 되는 해충’들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일반인들과 어울리지 않는 집시들은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인종적 ‘외계인’으로 취급당하며 청소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1941년 늦가을 5천명 이상의 집시들이, 1943년 봄 2만 3천명 이상의 집시들이 명을 달리했다. 다카우 수용소에서 만난 포스터에는 의자에 비딱하게 앉은 채 음울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한 장애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었다. 샛노란 포스터를 바탕으로 한 명의 장애인을 돌보기 위해 ‘우리’가 수많은 돈을 지불해야만 한다고 적힌 불만어린 문구가 눈을 잡아끌었다.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는데 불편한 시선이 뒤통수를 마구 내리쳤다. 평범한 기계공 ‘어윈’이 분홍색 삼각형을 가슴에 단 채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가 죄수복을 입어야했던 이유는 ‘동성애자’, 그 하나였다.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분홍색 삼각형을 죄수복에 달아야만 했다.

비껴간 스포트라이트, 조정해야 할 때

장애인, 동성애자 등은 ‘사회적 소수자’라는 이유로 대중에게 배척당했다. 이들은 국가폭력의 희생자기 때문에 더욱 치유하기 힘든 트라우마를 겪는다. 국가폭력은 국민들에게 위임받은 ‘공권력’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폭력을 휘두르기 때문이다. 대중이 동의한 공론에 따라 자행되는 폭력들 때문에 그 피해자들은 소수로, 변두리로 밀려나게 된다. 절대다수로부터 소속감을 박탈당한 소수자들은 그 화살을 대부분 자신에게 돌리기 때문에 부조리한 폭력에 저항할 의욕조차 꺾이고 만다. 공권력도 결국 사람이 행사하는 일이다. 자칫 감정이나 혼란에 빠져 이성을 잃는다면 나치의 비이성적인 국가폭력이 될지도 모른다.

국가에 의한 폭력은 아무리 국가 스스로 반성하고 사과하더라도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국가폭력을 다그치고 반성하는 것에 그칠 뿐 피해자들의 입장에 공감하고 사과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뉘른베르크에 위치한 전범재판소에서도 이와 같은 한계가 드러났다. 처음 전범재판소를 얼추 둘러봤을 때 전범들이 얼굴과 더불어 기록돼있던 이들의 죄목은 사실적이고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광활한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전범들의 모습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과거 독재정권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가지각색의 이유로 정당화하거나 넘겨버리는 우리나라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범재판소를 한 바퀴 돌고나면 남는 것은 범죄자들에 대한 분노와 탄식뿐이다. 독일인들이 전범들과 유대인들에게 분노와 사죄의 스포트라이트를 비췄다. 하지만 독일내 나치당의 정적, 동성애자, 집시, 장애인들은 그 빛에서 멀어져야만 했다. 유대인 박물관이 건립되고 반성이 줄줄이 이어졌지만 그 외의 피해자들을 위한 박물관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다카우 수용소와 토포그래피 데스 테로스에서도 이들이 몇 명이나 죽어나갔는지에 대한 아주 작은 설명 팻말만이 놓여있었다. 스포트라이트가 비껴간 이들은 여전히 소수자였다.

괴물이 된 국가권력에 대한 단죄, 유대인들에 대한 사죄 이후에는 사회적 외계인으로 취급 받았던 각계각층의 소수자들에 대한 관심이 뒤따라야 했다. 하지만 전시장 어느 곳에서도 이들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국가폭력이 남긴 상흔을 오롯이 아물게 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상처를 하나하나 면밀하게 뜯어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


글·사진_ 박소은 기자 thdms0108@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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