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피어나는 도시인문학

사진 박소은 기자
책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위해 두 저자를 찾았다. 이 중 두 저자는 서울광장과 종로로 대변되는 서울의 한 공간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사회 현상들, 그리고 그 현상들을 만들어나가는 인간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전개했다. 이들이 서울을 인문학적으로 접근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류보선 교수(군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문학은 기본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다. 우리는 문학을 통해 우리가 갖고 있던 ‘문제의 틀’을 적용해보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보듬어줘야 한다

‘고전을 본다는 행위는 언제나 현재를 염두에 두는 것이다.’ 지난 2월 별세한 소설가이자 철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명언이다. 작가는 문학을 통해 과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독자는 독서를 통해 작가와 소통한다. 류보선 교수의 ‘광장의 꿈, 혹은 권력의 광장에서 대화의 광장으로’는 1960년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통해 현재의 서울광장과 광화문광장을 조망한다.

서울광장과 광화문광장은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인 광화문일대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이 광장들의 초기에는 정치권력이 몰려들 수밖에 없었고 이는 ‘권력의, 권력에 의한, 권력을 위한’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다. 하지만 광장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모이는 곳으로, 미선이와 효선이를 추모하는 촛불 시위를 하는 공간으로, 광우병 논란으로 뜨거웠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가 이뤄지는 장소로 변모한다. 저자는 여태까지의 광장의 역할보다도 2011년 이후의 광장에 더 초점을 맞춘다. 2011년에서 현재까지, 그 사이에 광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세월호 여객선 침몰사고로 이어진다. 이후 광화문광장에는 세월호 분향소가 만들어지고 애도의 장이 형성된다. 하지만 애도의 장이었던 광화문광장은 이윽고 갈등의 장이 된다. 세월호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그 속에서 상처받는 사람들은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는 유가족들뿐이다.

최인훈은 갈등의 장이 돼버린 광장의 원인이 ‘일방적 설득’이라고 지적하며 제대로 된 대화와 소통이 이뤄지는 ‘쌍방향적 공간’의 광장을 촉구한다. 수많은 개인과 그들이 갇혀있는 ‘밀실’이 ‘광장’으로 변화할 때 극복 가능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바라보는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은 인간이 가진 꿈과 욕망을 마음껏 펼치게 하는 학문이다. 사회에는 소외된 사람들이 많고 이들에게 꿈을 가질 수 없게 하는 억압들도 많다. 인문학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학문이다. 잘나가는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좌절하고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삶을 만들어주는 학문 아닐까.

사실 최인훈이 말하는 ‘광장’은 가상의 공간인 반면 서울광장과 광화문광장은 실존하는 공간이다. 어떻게 엮을 생각을 했나

『광장』이란 작품은 주인공 이명준이 완벽한 체제를 찾기 위해 남한과 북한을 오고가는 이야기다. 하지만 남한과 북한 중 어느 곳도 그의 지향점이 아니었고 이를 비관해 자살하기에 이른다. 소설은 가장 이상적인 사회란 무엇인가, 개인의 밀실과 공동체의 광장이 어떻게 이상적으로 결합할 수 있을까, 이상적 사회의 실현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에 대해 수도 없이 질문을 던진다. 특히 밀실과 광장의 관계는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발전이 충돌하는 관계인데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최근 학계에서도 많은 논쟁거리다.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들이 여실히 드러난 광화문광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우리로 하여금 중요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작품이 나에게는 사회나 이론, 어떤 사람의 정치적 견해를 바라보는 데 중요한 ‘문제의 틀’과 같은 것이었다. 이번에 이 문제 틀을 가지고 직접적으로 광장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생겼다.

문학이 서울에 어떻게 적용되나

문학은 기본적으로 패배의 삶을 기록한다. 사회에서 주목하는 것은 성공하고 화려한 삶들이다. 그런 점에서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소설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낙원구 행복동’이라는 곳에서 살지만 실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낙원, 행복과 거리가 멀다. 개발론자들은 화려하게 변해가는 행복동을 가리키면서 낙원임을, 행복임을 강요하고 그런 외형적 낙원 뒤에 숨겨진 희생당한 사람들의 기억은 기억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학은 그들을 기록한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그렇고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도 그렇다. 문학작품들을 통해 도시의 역사를 보면 도시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이상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도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소외된 사람들을 줄이기 위한 도시 정책이 수립돼야 할 것 같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구성원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지를 보는 것은 중요하다. 서울은 과거 많은 것을 밀어내버리고 그 과정에서 삶의 터전으로부터 내몰리게 된 아픔이 서린 공간이다. 이제 외관의 화려함보다는 그 속에서 고통받았던 사람들의 아픈 숨결도 같이 기록하는 것이 서울이라는 도시를 재구성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신수정 교수(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우리는 노인을 이방인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노인을 통해 우리는 생산성 위주의 패러다임에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신수정 교수의 「노인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가 제대로 말하지 못한 것들」에는 충격적인 작품이 세 개나 등장한다.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와 소설 『은교』, 「그리움을 위하여」가 그것이다. 각각의 작품들은 노인들이 생기를 얻어가는 장면에 초점을 맞춘다.

저자는 <죽어도 좋아>의 주인공 두 노인이 ‘서로 사랑하고 싸우고 토라지며 화해를 한 후 더욱 과격하게 사랑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젊은이들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강조한다. 섹스가 잘된 날 달력에 의미심장한 동그라미를 남기기도 하는, 일흔이 넘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누가 보더라도 육체적 쾌락을 즐기는 이들이다. 예순아홉의 나이에 십대 소녀를 바라보며 젊은 피의 감각을 회복하는 『은교』의 주인공 이적요도 등장한다. 「그리움을 위하여」의 주인공도 처음에는 여유로운 자신에 비해 형편이 쪼들리는 동생에게 상전의식을 느끼다 동생이 늙은 남자와 재혼 후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자매애를 회복하게 된다.

모든 주인공들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했던, 생기 넘치는 열정으로 가득 차있는 노인들이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 주변에도 이러한 노인들이 실재하고 있음을 알린다. 종로 탑골공원에는 할아버지들을 상대로 매춘을 하는 일명 ‘박카스 아줌마’가 있다. 노인들은 탑골공원과 종묘공원에 모여 매춘뿐 아니라 바둑을 두고, 이발을 하고, 한끼의 식사를 해결한다. 종로에 위치한 서울노인복지센터로 발걸음을 옮기기보다는 인근의 종묘공원에 모여 자신들만의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저자는 종로라는 공간 속 노인들이 스스로를 여전히 욕망을 분출할 수 있는 주체로 간주하고 있다고 평한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완벽한 이방인으로 느껴지는 노인들. 노인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세대간 단절을 극복할 대안이 될 수 있다.

저자가 바라보는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은 사실 별것 아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 간의 의사소통, 정체성 확립 같은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파고드는 학문이다. 최근 인문학이 무용하다는 비판이 많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인문학을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도 사실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인문학이 무용하다는 말 자체가 사랑, 소통, 연대, 공동의 삶 등 인문학의 중요한 질문 자체를 봉쇄해버리는 것일 수 있다.

서울의 ‘노인’에 주목한 이유는

우리 사회 안에서 노인이라는 존재는 여전히 공적 영역에서 추방된 존재다. 추방된 존재가 어떻게 자기 공간을 점유하고 있고 공간을 통해서 정체성을 어떻게 확립해 나가는지를 살펴보려 했다. 생각 이상으로 자기들만의 공간이 굉장히 확실한 집단이었다. 흔히 실버벨트라고 이야기하는 종로 일대는 노인 외의 다른 세대가 들어오지도 못하게 장벽처럼 형성돼있다. 다르게 얘기하면 노인들은 그 안에서 ‘이만큼은 우리가 땅을 확보했다’, ‘우리들이 쫓겨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자신들조차도 바깥으로는 차마 나가지 못한다. 굉장히 이중적이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보기 싫은 노인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우리 삶으로부터 열외시킨 것이다. 점유하고 있는 공간 안에서 각자 어떤 욕망을 표출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

서울시립대가 위치한 청량리는 노인 인구가 매우 높은 편이다. 하지만 독자들의 대부분인 학생들은 노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늙어서 주책이야’라는 말이 있다. 글을 읽어보면 주책이라기보다는 노인들은 그들의 인생과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분명 노인은 우리와 분리돼있는 존재가 아니고,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다. 하지만 노인은 노인이 갖고 있는 비생산성 때문에 짐덩어리, 부양해야 할 존재, 책임져야 할 존재로 취급된다. 비효율과 비생산성이라는 패러다임 자체가 점점 노인을 고립된 존재로 만드는 것 같다. 또한 이런 패러다임을 통해 노인들을 우리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떼어내 버리기도 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노인이 될 것인데, 스스로를 무가치한 존재로 간주하는 그 미래를 우리가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노인이 갖고 있는 비효율성에 대해 의문을 품어봤으면 좋겠다. 이걸 인정하게 된다면 서로 간에 섞일 수 있는 접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정리_ 국승인 기자 qkznlqjffp44@uos.ac.kr
박소은 기자 thdms0108@uos.ac.kr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