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엘리펀트송>

▲ 연극 <엘리펀트송> 포스터
‘흰코끼리’, 쓸모없고 처치 곤란한 사물을 이르는 말. 누군가가 내 신상정보만을 보고 나를 한 마리의 흰코끼리로 규정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경멸에 가득찬 그의 눈빛에 상처받고 눈물 흘리지 않을까. 병원의 의사들조차도 환자를 속단하기 일쑤다. 의사들은 형식적인 질문과 상투적인 눈 마주침 속에서 진료기록이나 소견서만을 훑어보고는 환자의 인생을 속단하기도 한다. 간략한 정보만으로 우리를 다 안다는 듯이 행동한다. 우린 그 몇 줄의 정보에 의해 평가하거나 평가당한다. 연극 <엘리펀트송>의 주인공 마이클은 처절하게 외치고 있다. ‘정신과 의사라는 사람들이 내 사연은 들어보지도 않고 병원 기록부만 보고 나를 판단해버리잖아!’라고.

어느날 정신과 의사 로렌스가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 병원의 원장이자 그의 동료인 어윈은 로렌스의 행방을 아는 것으로 추정되는 마이클을 부른다. 마이클은 코끼리를 좋아하는 정신병자 소년이다. 그는 코끼리의 노래, ‘엘리펀트송’을 부르며 등장한다. 그는 언제나 ‘안소니’라는 이름의 코끼리 인형을 품에 안고 다니며 코끼리는 하루에 100kg 이상의 똥을 싼다는 둥, 눈물을 흘리는 동물은 코끼리밖에 없다는 둥 끝도 없이 코끼리 이야기만 한다.

▲ 광기어린 눈빛으로 어윈을 바라보는 마이클
평소 장난치기를 좋아하고 장황한 말만 늘어놓는 마이클. 어윈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마이클은 주치의 로렌스의 행방을 아는 것 같지만 순순히 알려주지 않는다. 어윈에게 필요한 것은 마이클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라진 동료의 행방이다. 그는 마이클에게 로렌스의 행방에 관한 단서만을 요구한다. 하지만 어윈이 자신의 진료기록을 보지 않았다고 말하는 순간부터 마이클의 태도와 행동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마이클은 로렌스의 행방을 알려주는 대신 어윈에게 조건을 내건다. 첫째, 자신의 진료기록을 보지 말 것. 둘째, 자신에게 초콜릿을 줄 것. 셋째, 자신들의 거래를 방해하는 수간호사 피터슨을 대화에서 제외시킬 것. 어윈은 제안을 받아들이고 둘의 익살스러운 신경전이 시작된다. 그 사이에 마이클은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하고 어윈에게도 마음의 변화가 나타난다. 로렌스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마이클을 보고 있던 그의 눈빛은 연민과 이해의 눈빛으로 바뀐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색안경을 쓴 채, 상대방의 본 모습과 상관없이 보고싶은 것만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상대방은 답답해하고 미쳐간다. 연극 <엘리펀트송>의 마이클처럼 말이다. 마이클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유였다. 자신의 진료기록만을 보고 경멸의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주고 사랑해주는 사람과 함께하는 자유. 굶주린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친 장발장의 사연보다는 강도라는 낙인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 살인자의 자식도 살인자라고 낙인찍는 현실. 색안경을 쓴 사람들에 의해 자신이 한 마리의 ‘흰코끼리’로 낙인찍힐 때, 그저 말라갈 것인가 아니면 색안경을 벗겨줄 것인가. 연극 <엘리펀트송>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국승인 기자 qkznlqjffp44@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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