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트위터를 하다 인상 깊은 글을 봤다. 평소와 다름없이 친구를 대했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화를 내고 자신과 멀어진다면, 이전부터 참아온 게 터진 것이라는 요지의 글이었다. 그렇다면 친구 사이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한 친구의 무례함 일수도, 한 친구의 인내심이 바닥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갈등’을 회피하려고만 했기 때문 아닐까.

모든 인간관계가 편하지만은 않다. 한 사람이 다혈질이라면 다른 사람은 그 성격을 맞춰준다. 쿵짝이 아주 잘 맞지 않는 이상, 직장 상사와의 관계나 학교 선후배와의 관계에서는 어느 정도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자신과 성격이 맞지 않아도 ‘내가 참자’하고 넘어가야 하는 상황이 지천에 널려있는 것이다. 참아야 하는 이유도 많겠지만, 근본적으로 상대와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피력하고 갈등하기보다 ‘좋게좋게’ 넘어가자는 생각이 더 크기 때문 아닐까.

감내해야 할 불편보다 관계를 유지해 얻을 효용이 더 크다면, 이 불편은 ‘견딜만 한 것’이 된다. 하지만 더 이상 불편을 인내하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에게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갈등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은 일종의 재갈이며 폭력이다. 강남역에 쏟아져 나와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자신 또한 잠재적인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왕왕 등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자신이 감내해야 했던 불편이 정말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불편’한 것이었음을 피력하고 이와 같은 관계를 청산하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목소리에 “성별 갈등을 조장하지 말라”거나 “나는 잠재적 범죄자가 아니다”라는 소리만 반복하는 것은 용기를 낸 상대를 참 지치게 한다.
강남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 성별 갈등이 나쁜 것만은 아닌 듯하다. 물론 강남역 사건 가해자가 앙심을 품고 촉발시킨 ‘갈등’은 논의할 가치도 없다. 다만 강남역에 몰려든 꽃, 포스트잇, 인파들이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 했던 많은 것들에 시비를 걸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재미있는 것은 갈등이 한 번 일어나고 나면 이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둘을 이어주던 관계 속에서 한 쪽은 이미 ‘내가 왜 이걸 더 참아야 하는 거지?’라는 의문을 싹틔웠기 때문이다. 무작정 인내하고 포용하는 것으로는 기울어진 관계를 바꾸지 못한다. 하지만 갈등을 통해 이 관계는 파국을 맞을 수도, 새로운 국면에 들어설 수도 있다. ‘갈등’을 통해 어떻게 바뀔지 두렵기도 기대가 되기도 한다.


박소은 학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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