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개혁과 보수’의 나라로 알려진 영국은 17세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혁명적인 나라였다. 수많은 반정(反正)을 통해 왕답지 못한 왕을 내쫓았을 뿐만 아니라 1649년에는 국왕 찰스 1세에게 사형을 집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때까지 전 세계 역사에서 왕이라는 자들이 살해를 당하는 경우는 전쟁이나 반란, 또는 음모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영국에서 찰스 1세는 공식적으로 재판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아 처형당했다.

찰스 1세는 스튜어트 왕조의 두 번째 왕으로 왕권신수설을 주장한 제임스 1세의 아들이었다. 왕권신수설이란 국왕을 중심으로 한 이 당시의 정치 이데올로기 중 하나로 왕은 신으로부터 직접 국가 통치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왕이 국정과 관련하여 책임을 질 대상은 국민이 아니라 오직 신뿐이라는 사상이었다. 이는 성직자(교황)가 신의 뜻을 왕에게 전달한다는 중세의 신정정치론이나 왕권은 계약의 산물이라는 이후의 계몽 정치사상과도 뚜렷이 구분되었다. 서유럽 역사에서 신과 속인 사이를 연결하는 ‘영매(medium)’의 역할이 성직자에게만 국한되었다면 왕권신수설은 그 역할을 국왕에게도 부여했다. 어쨌든 그 최초의 주장자인 제임스 1세와 달리 이를 국정에 강하게 반영한 자는 그의 아들 찰스 1세였다.

찰스 1세의 독단적인 정책은 중세 13세기부터 꾸준히 발전해 온 의회(parliament)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의회의 동의 없는 자의적이고 가혹한 과세와 측근들에 의한 국정 농단, 대외 전쟁에서의 패배 등은 결국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초반의 열세에도 의회파는 내전에서 승리했고 결국 찰스 1세를 ‘반역자’이자 ‘공적’으로 처형했다. 그런데 잠깐. 아니, 반역은 신하가 왕에게 하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왕에게 반역죄를 선고할 수 있단 말인가? 찰스 1세는 과연 누구에게 반역죄를 저지른 것인가?
중세 이래로 서유럽에 이어져 오던 사상 중 ‘왕의 두 신체(king’s two bodies)’라는 것이 있다. 이에 따르면 서로 다른 두 신체를 지니는 왕이 있는데 하나가 개인적인 인간으로서의 왕(king)이라면 다른 하나는 그가 대변하는 왕국 전체의 공적권위(KING)이다. 특히 영국에서 이 대문자 ‘왕’에는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가 포함되었으며 그것은 바로 영국 정치공동체, 즉 커먼웰스(commonwealth)를 의미했다. 이에 따르면 찰스 1세라는 개인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바로 이 국가와 국민이라는 진정한 ‘왕’에게 반역을 저질렀기 때문에 당연히 사형을 받아야 했다.

보수적인 영국 정치의 핵심인 의원내각제 앞에는 이렇게 혁명적인 국왕 재판과 처단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물론 역사적으로 4백여 년 전 영국의 특수한 정치 상황의 산물이겠지만 어쩐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적용될 수 있는 논리적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도 의회라는 것이 민의를 올바로 대변할 때의 이야기지만.


홍용진(도시인문학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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