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다 구두가 벗겨졌다. 31일 검찰에 출두한 최순실의 구두였다. 26일에는 명품 구두로 가득한 최순실의 신발장이 불필요하게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구두가 표상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인가.

언어는 프레임을 형성한다. ‘강남아줌마’는 프라다 구두와 맞물려 최순실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만든다. 최순실의 횡포가 밝혀짐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강남 ‘아줌마’다. 국정을 농단한 치밀한 계략가가 아닌 욕심 많고 허세에 찌든 여성 이미지만이 남았다. 단순히 욕심과 허세로 온갖 기업을 구워삶고 청와대 고위관료들을 움직일 수 있었겠는가. 언론과 정치인, 그리고 네티즌들의 발화 속에서 최순실은 아녀자·암탉·무속 여인 등 다양한 단어로 변주되며 그 능력을 평가절하당했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무너진 하늘에 솟아난 구멍을 발견한 셈이다. 덕분에 태블릿pc도 못 다루는 아줌마, 신경쇠약에 걸린 아줌마의 연기를 할 수 있게 됐으니.

최순실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를 무능력한 여자로 한정하는 시선은 사태를 호도할 뿐이다. ‘여성’대통령이어서, 강남 ‘아줌마’여서 이 문제가 발생했다는 울분은 본질을 이미 충분히 흐리고 있다.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이들은 이미 젠더를 초월한 권력가들이다. 여성이라는 틀에 끼워 맞추고 깎아내리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고 김치녀 담론에 맞춰 합리화하고 있는 것뿐이다. 구두가 72만 원인지 아닌지 보다는 그 구두를 신는 사람이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를 밝히는 게 더 핵심 문제다.


박소은(국문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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