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는 적어도 어감에서 진보에 뒤진다. 개선의 의미를 지닌 진보와 달리 보수는 현상유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보수적 가치라는 말은 고리타분하고 고루하게 느껴진다. 옛것이라는 보수의 이미지는 보수주의와 정설주의를 혼동하게 만든다. 정설주의란 신앙을 삶의 기준으로 세우는 견해다. 기독교 신자나 이슬람 신자가 종교적 신념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역사학자 제리 뮬러는 『보수주의』에서 정설주의자는 때로 급진적인 변화를 옹호하지만 보수주의자는 급진적 변화를 위험한 것으로 본다고 말하며 둘을 구분 짓는다. 보수주의자들이 안정을 추구하면서 종교와 다른 견해를 보였던 사례는 역사 속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영국의 보수당은 개인의 자선에 의해 복지가 이뤄져야 한다는 종교적 신념을 뒤집고 복지제도를 수립했다. 미국에서 동성혼이 합헌화되고 낙태가 제한적으로 허용되기까지는 보수 성향의 연방법원 판사들의 역할이 컸다.

이어 제리 뮬러는 보수주의를 반계몽주의와도 구별했다. 그는 현대 보수주의의 기원이 주류 계몽주의 사상 내에 있다고 본다. 데이비드 흄이나 에드먼드 버크 등의 계몽주의자들이 합리성과 실용성, 공리성에 입각해 당시의 계몽주의 기조를 비판하려고 노력한 것이 현대 보수주의의 시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보수주의는 수동적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진보주의에 맞서며 현실의 발전을 추구하는 개념이다. ‘보수주의=정설주의=종교=신앙=과학 거부’는 가장 오랫동안 이어져 온 편견이다.

조너선 하이트는 『바른 마음』에서 제리 뮬러의 보수주의자에 대한 이해에 공감한다. 이어 조너선 하이트는 도덕적 자본이라는 개념을 더한다. 도덕적 자본은 도덕 공동체를 지탱해주는 자원으로 협동적인 사회가 만들어지도록 한다. 공동체의 가치와 미덕, 규범과 관습, 제도와 첨단 기술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하지만 도덕적 자본의 총량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소수자들의 피해가 간과되기 쉽다. 진보는 이러한 피해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진보는 소수자와 약자를 위해 투쟁하며 세상을 바꿔 나간다. 하지만 변화가 도덕적 자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려하지 않으면 문제가 발생한다. 이때 사회의 근간이 흔들린다. 조너선 하이트는 이를 ‘좌파가 가진 가장 근본적인 맹점’이라고 지적한다. 진보주의자들은 한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바꾸려 한다는 것이다. 이는 ‘피시’라고도 불리는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슬라보예 지젝은 『새로운 계급투쟁』에서 모든 난민을 받아들이자는 유럽의 진보좌파들이 ‘최악의 위선자’라고 말한다. ‘올바름’에 대한 집착을 깨야 난민 문제를 제대로 인식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덕은 사람을 눈멀게 한다. 보수는 이를 제지한다. 보수주의자들은 도덕적 자본의 총량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막는다. 보수주의자의 어깨는 무겁다. 결국 보수는 어감에서 진보에 뒤질지 몰라도 역할에서는 뒤지지 않는 셈이다.

조너선 하이트는 미국 대학교수라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자신은 당연히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구 과정에서 사회 안정과 통합을 추구하는 보수의 가치를 깨닫고 책 말미에서 자기 안에도 보수주의자 성향이 있음을 고백한다. 아름다운 자기 고백이다. 지난 대선 때도 자신이 보수임을 고백하는 여러 정치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강간 공모 이력’, ‘토론회에서의 막말’, ‘정치적 이익에 따른 탈당’ 등으로 국민들을 실망시켰다. 『바른 마음』은 그들에게 외친다. “너희가 보수를 아느냐.”


최진렬 기자 fufwlschl@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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