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5·18 기획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사무총장 한광진(58) 씨는 5·18 민주항쟁 참여 유공자다.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광주사람이었다. 79년, 부마항쟁에 참여하러 부산에 내려갔다가 이듬해 4월,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광주로 올라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스물한 살의 나이로 5월 18일을 맞게 되었다.

5·18기념재단의 부상자회 사무실에 들어가자 다부진 체격의 남성이 앉아있었다. 한광진 씨였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정적이 흘렀다. “어떤게 듣고 싶어요?” 그가 말을 꺼냈다. 뭔가 말을 해야 했다. 1980년 5월 18일의 경험을 들려달라는 말에 그는 “광주에선 18일 이전부터 대학생들의 대규모 학생시위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진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며 말을 시작했다. 이어 “그날부터 공수부대가 내려온 후 ‘누가 맞아서 다쳤다느니, 죽었다느니’ 하는 소식들이 들려왔다”고 회상했다.

▲ 사무총장 한광진 씨는 “5·18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철저한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한다”고 말했다.
그가 죽은 듯이 공부하던 어느날이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는 마음에 그는 학원을 나와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시위 중 어느샌가 나타난 공수부대가 그를 향해 진압봉을 휘둘렀다. 그는 길바닥에 구르고 군화발에 짓밟혔다. 필사적으로 가만히, 실신한 척했다. 다행히 군인들의 발걸음이 멀어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는지 ‘저 새끼 살아있네’라는 말과 다시 달려오는 군화발 소리가 들려왔다”며 “살기 위해 바로 앞의 군인 한 명을 발로 차 넘어뜨리고 미친 듯이 달렸다”고 다급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근처 병원에서 사람들이 어서 들어오라고 외쳤다. “저도 모르게 가슴보다 높은 창을 그대로 뛰어넘었어요. 병원에서 보니 왼팔이 피멍으로 퉁퉁 부어있었죠.” 한 달 동안 입원을 했던 그는 병원에 가서야 머리 한쪽이 함몰됐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민주항쟁이 무고한 희생자가 줄어드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는 없었을까. 그는 고개를 저으며 자신들을 폭도로 몰아가는 폭도들에게서 민주주의를 지켜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도 5·18의 희생은 가치가 있었다. “5·18의 정신이 6월 항쟁의 주춧돌이 되고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냈다”며 “대한민국의 민주가 완성되진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단계에 이르게 한 배경에는 5·18이 있다”고 했다. 그는 “5·18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철저한 진상 규명과 광주시민들의 명예 회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국군의 총이 시민들을 겨누던 그날 과연 누가 발포명령을 내렸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문득 최근에 개봉한 영화인 ‘택시운전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무고한 시민이 군인의 총에 하나둘 쓰러지던 그 모습. 혹시 ‘택시운전사’를 봤느냐는 물음에 그는 “인상 깊은 영화였다”고 답했다. 그는 “광주시민들은 진정한 시민자치를 이뤄냈다. 계엄군이 잠시 후퇴했을 무렵, 시민들은 그 많은 은행들 중 단 한 군데도 약탈하지 않았고 총기도 수습위원회에 자진 반납했다. 이런 점이 영화에서 부각되지 못한 점은 아쉬웠다”며 “하지만 이 영화는 외국 기자의 수기를 바탕으로, 객관적인 눈으로 다시 한 번 국민들에게 5·18을 알렸다”고 영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예정됐던 인터뷰 시간이 다 되어갔다. 오늘날의 학생과 대한민국 국민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간단히 말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그때와 현재 상황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학생들이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데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그는 민주항쟁 당시 계엄령 때문에 의해 찾아볼 수 없었던 좋은 기사에 한이 있는 듯, 좋은 기사를 써달라고 했다. 그러겠다고 답하며 사무실 문을 나섰다.


정리·사진_ 서지원 기자 sjw_101@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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