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대신문
기획/특집
그날로부터 37년, 광주에 다녀오다광주 5·18 기획
서지원 기자  |  sjw_101@uos.ac.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09.12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최근 영화 ‘택시운전사’가 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크게 흥행했다. 영화는 광주 5·18 민주항쟁 도중 광주를 취재하러 온 외국인 기자 ‘한츠페터’와 그와 동행하는 택시운전사 김사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광주의 1980년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이 영화를 통해 사회가 다시 5·18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런데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아직 광주에는 그 날의 모습이 남아 있을까? 그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을까? 서울시립대신문 기자가 1박 2일 동안 5·18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광주를 직접 밟아보고 5·18에 참여했던 유공자의 말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초가을 느낌이 나는 아침, 수첩과 카메라를 들고 광주행 열차에 올랐다. 수첩을 펼쳐 이번 기행의 행선지를 그렸다. 광주에서는 영화 ‘택시운전사’를 모티브로 한 택시·버스를 이용한 투어가 진행 중이었다. 가이드를 대동한 투어에서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장소 하나하나에 원하는만큼 머물 수 없어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이번 기행은 자전거를 이용해 직접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광주의 여러 공공기관과 지하철역에서는 신분증을 맡기기만 하면 공용자전거를 오후 늦게까지 빌려 탈 수 있다고 했다. 광주송정역에서 지하철역 4개를 거친 후 시청 근처의 상무역에서 오후 10시까지 자전거를 빌렸다. 첫 번째 행선지는 광주시청이었다. 그곳에서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중 하나인 ‘한츠페터 기자’를 기리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대로를 따라 2km 정도 자전거를 타니 시청에 도착했다. 영화에서의 초록 택시가 나를 반겨줬다. 그 뒤로는 한츠페터가 찍었던 사진들뿐만 아니라 당시의 실상을 보여주는 여러 자료들이 있었다. 사진들을 하나하나, 찬찬히 살펴보았다. 자기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사진 속 꼬마 아이는 지금 시청 공무원이 돼 5·18 기념사업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한다. 희생자의 관 앞에서 울부짖는 모습, 군인이 시민에게 진압봉을 휘두르는 모습이 담긴 사진도 찾아볼 수 있었다.

   
 
광주시청 뒤에는 광주천이 흐른다. 광주천을 따라가면 5월 18일, 민중의 흐름이 처음으로 시작됐던 전남대를 찾아갈 수 있다. 강가에는 자전거도로가 있어 마음 놓고 달릴 수 있었다. 길게 자란 풀들과 함께하는 좁은 도로였지만 그런대로 좋았다. 군데군데 있는 다리 아래서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살짝 따가운 햇볕과 시원한 강바람이 기분 좋았다.

6 km 정도를 달리니 저 멀리 전남대병원이 보였다. 강을 뒤로하고 둑으로 올라왔다. 평범한 대학가의 활발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학가의 풍경은 익숙한 모습임에도 전남대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정문이 보였다. 5·18의 물결이 처음 시작됐던 바로 그곳이었다. 횡단보도 옆에는 5월 18일의 전남대 전경사진이 인쇄된 기념비가 있었다. 기념비에 무엇인가 붙어있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우리의 마음은 지지 않는다’는 자그마한 포스트잇이 붙여져 있었다. 누가 붙인 것일까. 전남대 학생일지도, 여행객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아직 그날의 광주가 살아있었다.

전남대 안의 메타세콰이어 숲을 달리다보니 어디선가 봤던 건물이 있었다. 방금 전 포스트잇이 붙여져있던 사진 속의 건물이었다. 예전에는 대학본부로 쓰였다는 건물은 오랫동안 맞아온 비바람에 타일이 벗겨져 있었다. 그 앞, 군인들과 학생들이 대치하고 있었을 자리 위에 지금은 벤치가 있었다. 벤치에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1980년 5월 18일 일요일은 지역대학 학생회장들과 학생들이 모여 평화시위를 이어가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하지만 새벽같이 군인에게 끌려간 회장들은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지금 그 자리에는 잠자리만이 맴돌고 있었다.

5·18 민주항쟁 중 최초로 총성이 울렸던 곳인 현 광주고등학교 앞으로 향하며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군인들이 탄 장갑차 한 대를 성난 시민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군인들은 탈출을 시도했지만 시민들에게 내몰려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순간 한 군인이 위협사격을 하다 그만 살상 사고를 내고 말았다. 군인 시민 할 것 없이 모두가 도망친 그 자리에는 시체 한구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날들에서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피해자였다. 광주역을 지나 광주고등학교로 향하는 길은 큰길이어서 편하게 갈 수 있었다. 15분 정도를 달려 도착한 그곳이 그날의 사진과 닮은 점이라고는 아직 여기가 삼거리라는 점이었다. 주변에는 시장이 있어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광주고등학교에서 남쪽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니 5·18 최후항쟁지였던 구 전남도청이 있었다. 광주는 유독 신호가 길어 횡단보도 앞에서 주변을 많이 둘러보게 됐다. 건너편에 5~60대로 보이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체격이 좋지는 않지만 인상에서 당당함이 묻어났다. 37년 전 그날도 저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을까? 전남도청이 옮겨졌지만 철거되지도 않고 그 자리에 남아있다던 분수대 너머로 주말마다 연다는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그날은 마술쇼를 하고 있었다. 마술사가 지원자를 모집하자 한 꼬마 아이가 쪼르르 달려나갔다. 마술을 구경하며 무거운 마음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아침,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는 학생들을 군인들이 막아서고 있다. (위)37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건물은 이제 나이가 들어 빛바랜 모습이었다. (아래)

여기는 금남로. 구 도청 앞에 쭉 뻗은, 민중들의 집합지였다. 지금은 광주도심이 된 그곳에 여러 사적들이 있었다. 헬리콥터의 기총소사를 맞은 채로 남아있다던 전일빌딩, 당시 시민자치의 중심지였던 이뤄졌던 YWCA 건물터 등 그날의 흔적들이 여럿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휙 지나쳐버리면 안될 것 같았다. 자전거에서 내려 기념비 하나하나를 살펴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어느새 저녁이 찾아왔다. 생각보다 너무 지쳤다. 내일은 5·18의 영령들이 잠들어있는 묘지에 방문하려 했었는데, 지친 몸을 끌고 가기에는 숙소로부터 너무 먼 것 같았다. 다행히도 다음날 낮에 출발하는 5·18버스투어가 있어 바로 신청했다.

다음날, 늦은 아침을 먹고 투어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향한 국립5·18민주묘지 입구에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분향과 향로가 놓여있었다. 분향을 한 줌 쥐어 향로에 뿌리자 연기가 피어올랐다. 묘비 하나하나에는 그들의 이름과 생일, 타계일과 그들의 사진이 새겨져 있었다. 그때 바로 내 나이대였을, 60년 전후에 태어난 사람들의 묘비들이 눈에 띄었다. 묘지 한 쪽에는 영정사진들이 둥근 벽에 가득찬 건물이 있었다. 그들의 눈 하나하나가 그날을 잊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듯했다.

이제 버스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으로 향했다. 당시의 모습을 담은 여러 사진들과 함께 당시 검열됐던 신문들, 시민들이 손으로 직접 기계를 돌려 찍어냈던 소식지들이 있었다. 5·18의 배경부터 그 후의 이야기들까지 한 번에 훑어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시간이 부족해 곧 기록관을 나서야 했다. 버스로 향하는 길, 가이드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광주시는 사적들을 둘러볼 수 있는 오월길이라는 코스를 만들어놨다고 한다. 광주에 방문하기 몇 주 전에 가이드 신청을 하면 그 길을 가이드와 함께 다니면서 천천히 설명을 들어볼 수 있다고 했다.

다음으로는 당시 헌병들이 머무르고 시민들을 연행했던 터에 위치한 5·18기념공원에 도착했다. 시민들이 갇혔던 유치장은 너무나 좁았다. 작은 강의실 한 개 크기도 안되는 장소에 수십 명의 사람들을 가둬놓고 한 끼에 밥 세 숟갈만 줬다고 한다. 그 옆에는 시민들을 처분하기 위해 만들었다던 임시 재판소가 있었다. 그 당시를 재현해놓은 재판장에는 여러 군인들이 재판석에 앉아있었다. 폭도같던 국가권력이 오히려 시민들을 폭도라고 누명 씌우고 탄압했던 곳. 이 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그건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이었다.

어느덧 저녁이 됐고 버스투어도 끝났다. 광주와 작별 인사를 하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2일간의 여정은 짧지만 긴 여행이었다. 버스투어 마지막에 가이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5·18은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이끌어내는 주춧돌이 됐지만 5·18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진실이 밝혀지는 그날까지 부디 광주의 그날을 잊지 말아주길 바랍니다.” 그러겠다고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글·사진_ 서지원 기자 sjw_101@uos.ac.kr
 

<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인기기사 
1
점점 희미해지는 ‘청량리 588’의 불빛
2
아청법, 다운로드만 받아도 처벌?
3
“서울시립대에 꼭 가고 싶어요”
4
인물동정
5
우리들이 만드는 대학축제 N.U.D.E(New? Um~ Different Exit!)페스티벌
사진기사 
서울로7017의 낮과 밤

서울로7017의 낮과 밤

지난 5월 20일, 서울역 고가도로가 ‘사람길’로 탈바꿈하며 시민들에게 ...
신문사소개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130-743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서울시립대로 163 미디어관 3층 대학신문사  |  전화 : 02-6490-2494  |  FAX : 02-6490-2492
발행인 : 원윤희  |  편집인 겸 주간 : 이주경  |  편집국장 : 김태현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대환
Copyright © 2013 서울시립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uo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