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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노니, 흐노니<소설 부문 당선작>
안양예술고등학교 윤수빈  |  press@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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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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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예술고등학교   윤 수 빈


방어기제로서의 웃음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이학년 때였다. 그쪽에서 일부러 어설픈 사람을 보내준 것인지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랐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작별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버린 중학교 친구 하민의 흐노니였는데 하민의 이대 팔 가르마와 완벽히 반대 방향으로 타버린 가르마가 웃음을 불러 일으켰다. 하민의 버릇과 몸짓, 말투를 배워온 그 흐노니는 하민과 함께 했었던 내 옛 시간을 모두 뒤섞어버렸다. 이제야 나쁜 말로 바꿔보자면, 말아먹었다. 나는 어울리지 않게도 그 앞에서 배를 잡고 앞뒤로 몸을 기울여가며 웃고 말았다. 교복 카라 위에서 반짝이는 주홍색 뱃지와 그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주홍 글씨 개정판본. 나는 그 순간 하민이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것이 내가 부른 처음이자 마지막 흐노니였다.

이모는 결정해야 했다. 이모로서 계속 남아있을 것인지, 아니면 오영현의 삶을 대신 살아줄 것인지 말이다. P시에 큰 규모의 버스사고가 난 것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폭발 위험이 없을 줄 알았던 친환경 가스가 팽창해 버스 배관이 터졌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모두들 이때다 싶었는지 인터넷 기사 댓글 창에는 알바들이 작성한 댓글이 판을 쳤다.
└흐노니_항시 대기 중, 완벽히 변신합니다.
└잊지 못한다면 새로운 흐노니와 함께-!
나는 스크롤을 내리다가 화면에서 눈을 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방지 턱을 넘었는지 온 몸이 울렁거렸다. 어느새 집에서 꽤 멀리 떠나온 듯했다. 이모가 핸들을 꺾으며 백미러로 나를 살펴보더니 호기롭게 말했다.
“봐주는 거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복도를 따라 걸었다. 아까 약속했지? 이모는 나를 향해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오늘 이모는 흐노니와 곡비를 겸하는 모양이었다. 흐노니가 두 가지 역할을 하는 것은 그들의 룰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이모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 일들이 앞으로 내게 좋은 의식주 제공원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어림짐작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걸었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안쪽에 들어서자 내 또래로 보이는 한 소년이 이모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장례식장 한쪽에 자리한 소파에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잔뜩 끌어안은 짐 가방이 거북했다. 그냥 준노니라고 불러. 초짜야 초짜. 귓가에서 들려오는 이모의 속삭임에 나는 준노니라 불리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름의 앞 글자와 흐노니의 ‘노니’를 딴 모양이었다. 흐노니들은 가끔 곡비 노릇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돈이 아주 없을 때나 경험이 필요할 때였다. 쟤는 경험이 필요한 케이스. 이모가 소곤거렸다. 곡비가 쓰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진짜 울어야 할 사람들이 기력이 쇠해서 울지 못하거나 황망해서 울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울음도 사고판다는 말이 딱 맞아 떨어졌다. 흐노니인 이모는 배를 먹고 있었다. 배의 향이 싫다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사라지거나 떠나면, 남은 사람들은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고 그중 몇몇은 흐노니를 불렀다. 언제부턴가 대체 가능한 것들은 많아지기 시작했다. 흐노니는 다른 사람의 감정 또는 그 사람 자체를 대체하는 일을 했고 보다 소모적인 일들은 곡비가 맡았다. 소년이 완장을 차고 절을 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모는 곧 줄줄이 들어오는 손님들 때문에 치마를 걷고 일어났다. 이번에 이모가 맡은 역할은 어머니 살아생전 효도만 했던 늦둥이 첫째 딸. 이모를 오래 쫓아다니다 보니 이런 것은 짐작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예전에 한번 철없는 막내 역할을 맡아 장례식장이 떠나가라 울고 불기도 했던 이모였다. 옷을 사러 가도 이모는 옷을 고르지 못했다. 옷뿐만이 아니었다. 음식도, 취미도 다른 여러 가지 것들도 이모는 선택하고 결정하지 못했다. 흐노니는 그런 일이었다. 설령 대답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전의 사람의 것이거나 그 전전 사람의 것에서 우러나온 선택이었다.

그릇이 바닥을 때리고 퉁겨 오르고,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육개장이 눅눅한 장례식장 바닥을 적셨다. 웬 남자가 이모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있었다. 남자의 양말 뒤꿈치에 콩나물 머리가 노랗게 뭉개져 있었다. 남자는 친지도 아니었고 친인척도 아닌 ‘취객’이었다. 흐노니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하지만 나는 남자의 멱살잡이가 다른 뜻 없는 주사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소년이 달려들어 남자를 뜯어말렸고 나도 이모 쪽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이모는 용케도 내 쪽으로 손을 작게 내저었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말이었다. 이모의 가슴에 달린 주황색 뱃지가 반짝였다. 흐노니가 급격하게 많아진 혼란스러운 상황에 정부에서 실시한 정책이었다. 이모는 뱃지 주변을 손으로 쥐어뜯듯 감쌌다. 잔뜩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순간 이모가 뱃지를 뜯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지만 이런 비일비재한 일들과 차별들을 잘 참아온 이모였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차에서 나는 손을 계속해서 꼼지락거렸다. 셋째 손가락과 넷째 손가락을 살짝 구부리고 공중으로 손을 뻗었다. 마술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습관적으로 만들던 손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선 무대 중에는 학교 강당이 제일 큰 곳이었지만, 수업시간에 빠져드는 달콤한 잠 속에서 나는 나만의 피날레를 꿈꾸고는 했다. 항상 같은 상상이었는데 셋째 손가락과 넷째 손가락을 구부린 채 공중으로 떨어지는 종이들을 온 몸으로 맞곤 했다. 그러던 어느새 그 ‘손 모양’은 마술을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어버렸다. 나는 마술을 떠올릴 때마다 손가락을 구부렸다. 마술에 대한 내 마음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이모는 백미러로 내 손을 흘긋 보고는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극단에 들어가겠다는 나를 빗자루로 사정없이 내리치던 아빠를 막은 것도 이모였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잡초가 듬성듬성 난 마당 위로 연습용 카드들이 흩어지고 마리의 흰 날개가 꺾였다. 오늘 새벽 이모의 집으로 피신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나는 마리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곧장 마술도구들과 옷가지들을 크지도 않은 가방에 억지로 욱여넣고 무조건 걸었다.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 끝까지 찼다. 집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고 생각되었을 때 나는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는 첫째인 엄마를 낳고 한참 후에야 이모를 보았다. 때문인지 덕분인지 엄마와 이모는 나이가 열네 살이나 차이 났다. 이모는 갑자기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만큼 작은 사무실 형태의 업체에서 흐노니로 일했다. 그 사무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곡비들의 숟가락. 종종 들렀던 이모의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다리를 뻗고 있다 보면 너무 많이 울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곡비들을 쉬이 볼 수 있었다. 그들은 계를 들어 자그마한 냉장고를 사무실에 들였다. 냉동실에 수저를 넣어놓고 얼린 후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고개를 들고 뜨거운 눈두덩이에 얼린 숟가락을 지그시 누르는 식이었다. 그러면 조금 나은 모양인지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한 후에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연기 지망생이나 실패한 연기자들 중에서도 돈이 절박하게 급한 사람들이 곡비가 되었다. 그들은 손에 쥐고 싶었던 금빛 트로피들을 눈물 속에 녹여냈다. 곡비들의 눈에서 주물을 녹인 듯 뜨거운 눈물방울이 흘러나올 때마다 나는 숙연해졌다. 그런 이유가 아니면 그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그만큼의 슬픔은 나오지 못해. 이모는 그렇게 말했다.

이모 역시 동그란 안경이 잘 어울리며 이마에 조그만 자상흉터가 난 여대생, 오영현으로 일주일째 살아오고 있었다. 오영현은 한동안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P시 버스사고의 희생양 중 하나였다. 의뢰가 들어왔을 때 이모는 고민하지 않고 오영현의 흐노니가 되는 것을 승낙했다. 체격도 비슷하고 나이 차이도 나지 않으니 보다 쉽고 편리하다는 이유였다. 그녀와는 옛날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때도 이모는 흐노니 일을 하던 중이었다고 들었다. 순간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오래전 이모에게서 오영현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만 같았다. 의뢰를 한 가족들은 원래 약속했던 기간보다 이모가 곁에 더 머물기를 원했다. 처음에 그들이 원했던 것은 단 한 번의 저녁식사였는데도 그랬다. 이모는 이것을 마술이라고 불렀다. 완벽한 흐노니가 되어 병에 걸린 사람들의 감정을 신기루처럼 사라지게 하는 일. 그런 것치고는 마술의 기본인 카드 섞기마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이모였다. 이모의 손에서 카드 몇 장이 바닥 여기저기로 튕겨 나갔다.
“아이, 이모는 화투도 안 섞어봤어.”
“이해해줘. 그래도 마술은 하고 싶은 걸.”
이모는 카드를 내려놓고 시럽을 많이 넣은 아메리카노를 머금었다. 오영현이 좋아했던 것이었다. 이모의 왼쪽 가슴 위로 주황색 뱃지가 반짝였다. 반짝이는 이모의 뱃지를 바라보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끊겼다가 계속되기를 반복되던 진동은 끝내 사그라들었다. 엄마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스무 통이 넘었다. 그것과 별개로, 이모는 결정해야만 했다.

들어가게 된 마술 극단에는 흐노니가 없었다. 신기하다고 생각했음에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물함 옆 칸을 쓰는 수영이 그 이유를 짐작했다. 극단 사람들은 자신을 온전히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지 않는 이상 극단에 들어오기도 쉽지 않을 테니까. 이모는 원하는 것이 없어서 흐노니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때 수영이 중얼거렸다.
“불안한 거야. 사라질까봐.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는데 자신이라는 존재는 너무 옅은 거지. 심지어 흐노니는 노동력 대비 보수가 센 일이니까 간단한 알바를 하다가 본업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많고, 그만큼 대체라는 건 흔해졌으니까.”
수영의 말은 어느 정도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모가 흐노니가 된 것은 필연적인 일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꿈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응석만 부리며 자란 이모가 할 일은 없었다는 말이 딱 맞을지도 몰랐다. 번화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이모에게 날아온 것은 구인광고였다. 흐-노니. 이모는 중얼거리다가 사무실의 약도를 눈에 담았을 것이다. 언젠가 왜 하필 ‘흐노니’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이모는 소장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설명해 주었다. 소장은 장부를 넘기다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팔을 위로 치켜들었다. 곧 그는 입으로 휘- 휘 소리를 내며 손을 움직였다. ‘순 우리말이야. 이름에서부터 느껴지지 않아? 샥. 샥. 언제든지 사라졌다가 언제든지 나타나는 것들 말이야.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유원아.”
뒤를 돌아보니 떡볶이 코트를 입고 유채꽃다발을 든 이모가 보였다. 첫 공연을 축하한다며 꽃다발을 내미는 이모였다. 평소 이모가 입었던 옷은 편한 재질의 면바지였는데 오늘은 치마를 입은 것으로 보아 오영현이 입는 대로 입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모는, 아니 오영현은 앞으로 오영현으로 살 것을 결연하게 말했다. 이미 시작된 일이었다. 나는 망설이다 이모의 말에 대답했다. 공연 보고 가.

   
 
첫 공연이었다. 새로 들어온 나는 마술 중반부터 끝부분까지만 무대에 등장했다. 피날레는 나보다 어린 녀석이 맡았다. 내심 부러워하는 표정을 짓자 수영이 나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도와주는 차원이야. 오늘은 저 애가 주인공이거든.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를 위해 고른 자리는 일명 ‘첫 줄’인 ‘S석’이었다. 워낙 작은 소극장이라 S석이니 A석이니 할 것도 없었지만 마술사의 마술과 목소리를 가장 생생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자리니 나름 신경을 쓴 것이었다. 혹시라도, 오영현으로 산다면 이모는 더 이상 마술을 좋아하지 않으려나.

불꽃을 뿜는 마술을 할 때도 비둘기가 무대를 날아다닐 때도 이모는 무대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곧 스포트라이트가 내가 서있을 자리를 밝혔다. 성장의 경계에서 이모는 늘 나에게 작은 박수를 쳐준 사람이었다. 가면 안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학교 마술부에 들었을 때도 가면을 쓴 채 마술을 했다. 관객들은 내 민낯이 드러나면 더욱 크게 박수를 쳤는데, 피날레의 압도적인 분위기 속에서 마술사의 얼굴이 드러나는 쾌감 때문인 듯했다. 더 깊은 뜻은 알 수 없었다. 이모와 눈이 마주쳤다. 이모는 자신의 얼굴을 본 듯이 나를 오랫동안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흐노니, 금방 사라질 것 같은 이름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 아래로 헐레벌떡 내려와 수영에게 이모가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곧장 나가셨어. 꽃다발에 편지 뒀다고 하셨는데. 나는 노란 꽃송이 속에서 빼꼼 모습을 드러낸 종이를 뽑아들었다.
공연 잘 봤어. -오영현-

나는 손에서 팔랑팔랑 떨어져 내리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구둣발로 정신없이 종이를 밟았다. 오영현이 무슨 존재이기에. 왜인지 모르게 분했다. 이모를 빼앗긴 느낌이었다. 오영현에 대해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도저히 짚이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종이에는 발자국과 번쩍거리는 가루들, 무대에서부터 밟고 지나온 폭죽들이 엉겨붙어있었다. 오영현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궁금증에 사로잡혀 나는 극단일이 끝나고 나서도 번화가 이곳저곳을 쏘다니게 되었다. 흥신소를 찾기 위해서였다. 주홍색 거리에는 주홍색 뱃지가 넘쳐났다. 거리에서 헤매기를 며칠째 운 좋게도 누군가가 흥신소를 소개시켜주었다. 나는 괜한 호기심과 노파심에 그의 가슴팍을 살폈다. 뱃지 같은 건 없었다.

소개받은 흥신소는 낡고 좁았다. 죽은 사람의 의뢰도 가능한지 묻자 사장은 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 바라보듯 했다. 요즘 세상에 죽은 사람 하나 캐는 게 뭐가 그리 어렵습니까. 옛날에는 사는 곳과 직업 정도만 알 수 있었지만 요즘은 또 다르지요. 흥신소 사장이 껄껄 웃었다. 사장의 소매 끝에 달린 작은 배지가 반짝거렸다. 흐노니의 표식이었다. 사장도 흐노니라니, 누가 흐노니이고 누가 정말 본인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주홍 글씨 같아. 그렇지 않니? 이모는 뱃지를 만지작거리며 그렇게 말하곤 했다. 사장이 낡은 커피잔을 조용히 내려놓자 정적이 내려앉았다. 기다리라는 대답이었다. 나는 햇빛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부유하는 먼지들을 바라보았다. 청소를 하지 않는 습관은 흐노니의 것일까. 혹은 그의 것일까. 자료는 생각보다 빨리 우편함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봉해져 있던 봉투를 뜯어 종이뭉치를 꺼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모는 재킷을 여몄다. 전날 세차게 내린 비에 푹 젖은 나뭇잎이 자꾸 이모의 신발 밑창에 달라붙었다. 안녕하세요! 이모는 우렁찬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어린 오영현이었다. 고개를 숙인 오영현의 바짝 올려 묶은 머리가 뒤집어져 달랑거렸다. 수능이 끝나고 흐노니들의 수는 급격하게 늘었다. 사람들은 길가에서 반짝거리는 주홍색 뱃지에 예민해졌고 그래서인지 그때가 다가오면 너나 나나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흐노니세요? 오영현의 눈이 바닥으로 한번 굴렀다. 이모의 얼굴을 본 후였다. 선배는 죽은 건가요, 사라진 건가요. 목소리에 울음이 잔뜩 묻어있었다. 좋은 언니였다고, 오영현이 그 말을 반복하는 것을 이모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오영현이 원래 ‘선배’라는 사람과 가까웠던 탓인지 이모와 오영현은 금방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렇게 되어야 했던 일이기도 했다. 선배, 만약 다른 사람의 흐노니가 된다면 제가 되어주세요. 오영현이 고개를 숙이자 안경이 코끝에서 달랑거렸다. 이모는 오영현의 코끝에 걸쳐진 안경을 빼내 자신의 코에 걸쳤다.

나는 봉투를 대강 접고 겉옷을 입었다. 전에도 이런 이야기를 들었던 듯 기시감이 들었다. 하긴 그녀의 부탁은 흐노니와 가깝게 지낸 사람들이 종종 하는 말이기도 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져 시내로 버스를 타고 나와 걸어 다녔다. 모퉁이를 돌자 제법 큰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광판에 V가 보였다. IMF시절 무일푼으로 상경한 그는 지금 한 대기업의 총수가 되었고 도시의 그 어떤 랜드 마크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그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었다. V는 흐노니를 마냥 곱게 보지는 않았다. 넘쳐나는 흐노니들 속에서 도망치지 않고 살아와 이 자리에 오른 것이 그에게는 커다란 의미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성공으로 오는 길속에서 잃은 사람들을 기억해냈다. 어쨌거나 흐노니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도망쳐 간 사람들보다 V는 높은 곳에 올라있었다. 나는 멈추어 섰다. V의 인터뷰였다.

‘요즘 흐노니들이 흉내 내던 사람들의 자리에 정착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만큼 자신의 자리를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도 많다는 말이죠.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사고였던 본인의 의지에 관련된 것이던 그렇다는 말입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중 벨소리가 울렸다. 흥신소 사장이었다. 이런 일들을 자주 겪어본 사람의 평온한 어투였지만 그 말투 속에는 마치 내가 겪어야 할 것들에 대해 무난하게 설명하는 듯한 감정도 배가되어 있었다.
“의뢰 부탁하신 오영현씨 말입니다… 다시 알아보니 P시 버스사고 사망자 명단에도 없더라고요. 영 꺼림칙해서…”

제가 알아봤습니다. 전화기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영현은 죽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정보를 받아들인 뇌가 심각한 오류를 만들어 냈다. 흥신소 사장은 오영현이 흐노니로 일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이며 내게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고 있는지 물었다. 어디서부터 거짓인 것일까. 어디서부터 놓친 것일까. 나는 겨우 집에 들어가지 않은 지 한 달이 넘었다고 대답했다. 집으로 가보라는 사장의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가 끊겼다. 한 번 엉킨 끈이 두세 번 꼬여버린 것 같았다. 서둘러 집으로 내려가는 차표를 끊고 정류장 한쪽 구석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죽지 않았다면, 흐노니로 일하고 있다면, 오영현도 자신을 버린 것일까. 그렇다면 심각한 일일까. 깜박 잠들었는지 꿈을 꾸었다. 손이 굳어버렸다. 셋째 손가락과 넷째 손가락뿐만 아니라 다른 손가락들도 구부릴 수 없었다. 손은 빠르게 돌덩이처럼 변해갔다. 순식간이었다. 나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깼다. 한동안 양손이 저릿저릿했다.

집 쪽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한 여자가 담장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문을 밀고 들어가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지만 그녀를 다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 교복을 입고 담장에 기대어있는 여자는, 내 흐노니였다.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담배를 땅에 떨어뜨리고 신발로 지졌다. 충동적으로 주머니 속에 있던 그녀의 팔을 끄집어냈다. 힘없이 딸려 나오는 소매 끝에 작은 주황색 뱃지가 달려 있었다. 그녀가 내 손을 뿌리쳤다.
“엄마가 유원양을 찾았어요.”
그런데도 유원양은 오지 않았잖아요. 순간적으로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엄마가 정착을 요구했나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려 나왔다. 그녀는 뱃지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V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가 나를 응시했다.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보고 있으려니 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누군가를 읽을 수 있었다. 좁은 콧볼과 하얀 피부. 전체적으로 나와도 이모와도 닮은 얼굴. 그리고 무엇인가가 머릿속에서 흐릿하게 떠올랐다. 바깥쪽부터 번지듯 점점 더 선명해진 그 얼굴은 바로 오영현의 얼굴이었다. 흥신소 사장이 보낸 정면사진과 똑같은 이목구비였다. 입 밖으로 오영현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녀가 발밑에 있는 담배를 마저 비비다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표정이 얼마나 바보 같았을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모가 오영현의 흐노니를 했다면 오영현도 나의 흐노니를 할 수 있었다. 이모와 내가 닮았으니 그것은 벌어질만한 일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자 그녀가 앞을 막아섰다. 오영현을 뿌리치고 대문으로 파고들었다. 깡,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가 대문에 부딪히고 문이 녹슨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집 마당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디건을 입고 화초에 물을 주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내가 아닌 것과 이렇게도 잘 살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듯 엄마는 정갈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나는 엄마 쪽으로 다가가 엄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중간 중간 엄마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흔들리는 몸과 함께 엄마의 눈동자가 동요하듯 흔들렸다. 엄마는 자꾸만 무슨 말인가를 뻐끔뻐끔 뱉었는데 그것은 어떤 변명 같기도 했고 내가 온 것에 대한 일말의 반가움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엄마는 나와 오영현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인 엄마는 계속 내가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오영현이 다가와 나를 집 밖으로 끌어냈다. 지금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보였다. 괜히 눈물이 고였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빼앗겼다. 나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반면 나와 마주한 그녀는 덤덤했다. 그럴 줄 알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얼굴이었다. 오영현이 집과 반대방향으로 난 골목길로 주욱 걸어갔다. 나는 그녀를 따라갔다. 무슨 말이라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급히 신고 뛰어온 슬리퍼가 모래를 먹었다가 뱉어내기를 반복했다. 발뒤꿈치가 까끌거렸다. 오영현은 한참을 걷다가 뒤돌았다.
“P시에 있는 산 알아요?”
뜬금없었다. 질문에 대답도 하기 전에 오영현이 거듭 물었다.
“그곳에 있는 소원 탑에도 자주 가지 않았나요.”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소원탑. P시의 산에 소원탑이 있다는 것은 열두 살 때 알았던 사실이었다. 산 체질인 엄마와는 달리 나는 조금만 깊숙하고 풀이 많은 곳에 들어가면 풀독이 올랐다. 그래서 산 깊은 곳에 들어갈 때면 엄마는 나를 산 초입에 두고 가곤 했다. 나는 등산로 입구에 있는 소원 탑에서 홀로 시간을 보냈다. 무료한 시간들이었지만 손에 자잘하게 올랐던 풀독들을 생각하면 이것만큼 나은 것이 없었다. 나는 누군가가 세워놓은 돌을 무너뜨리고 내 돌을 세워놓고는 했다. 빠진 돌들 사이에는 내 소원들을 듬성듬성 채워놓았다. 맞다. 나는 돌연 오영현의 말을 이해했다. 나만 그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모든 돌들을 내 소원으로 채우는 헛짓거리는 하지 못했으니까. 어떤 여자아이가 나와 함께 있었던 날들 때문이었다.
“먼저 물어봤었잖아요. 무슨 소원 비냐고.”
나보다 조금 나이가 많았던 것 같았다. 단 둘이 있던 적이 다섯 번을 넘어가기 시작할 때 그 애에게 내가 먼저 물었다. 그 애는 돌을 던졌는데, 돌은 날아가 탑 맨 위쪽에 있었던 돌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았다. 언니. 여자아이는 언니가 생기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었다고 했다. 이마에 났던 자상 흉터를 가리지 않고 하나로 설컹설컹 묶은 머리. 오영현이었다.
“요즘 남의 자리를 훔치는 흐노니들이 있다고 들었어요.”
내 말에 오영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뿌옇게 변한 시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오영현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없이 서있었다. 언니는 어디 있어요. 오영현이 물어왔다. 이모가 무엇을 하고 있고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줄 생각은 없었다. 나는 뒤돌아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오영현이 내 자리를 차지하려는 이유는 바로 이모 때문이었다. 계속 뛰어서, 이어 정류장을 빗겨지나가는 버스를 따라 내달리며 손을 휘저었다. P시에 이모가 있어야만 했다.

이모는 그렇게 완벽한 오영현의 모습으로 변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히 정리된 손톱, 모직코트와 아래로 묶은 말총머리. 이모는 안경을 벗고 품에서 작은 손수건을 꺼내 안경을 문질러 닦았다. 오영현의 것이냐고 묻자 엄마가 주었다 대답하는 이모였다. 할머니가 아닌 오영현의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묘했다. 이모는 잘못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모는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아는 이모는 흐리거나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어째서 흐노니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혹 그것이 오영현과의 옛 약속 때문이라면 사실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말했다. 오영현은 죽지 않았어. 이모가 턱을 움직여 씹는 것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오영현이 P시에서 죽었다는 건 거짓말이야. 버스 사고를 이용하고 이모를 찾아다니고 있었어. 우리 집에도 있었고, 내 흐노니를 하고 있었어.”
흥분한 내 말에도 이모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고등학교 때도 이모를 잘 따르던 그녀였다고 했다. 오영현의 선배 흐노니 일이 끝났을 때도 그녀는 이모를 끈질기게 쫓았다. 오영현은 유복하게 자란 편이었다고 했다. 가지고 다니는 물건도 새것이었고 부족함 없이 돈을 쓰는 편이었다고 말이다. 이모는 다시 침묵했다. 첫째였어. 맏이. 우리는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컵받침에 컵을 두고 빙빙 돌렸다. 그 시간동안 이모는 어느 정도 오영현을 이해하는 듯했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특히 자신 같은 사람을 언니로 두고 싶어 하는 것이 그랬다.
“왜 그 사람한테 그렇게 신경 써?”
나는 말을 뱉고 나서야 후회했다. 이모가 나를 응시했다. 나는 천천히 입을 가렸던 두 손을 아래로 내렸다. 레몬 아이스티의 신맛이 어금니 끝으로 사라졌다. 너랑 닮았어. 나는 가르마가 깔끔한 이모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랑도 닮았지.”
걔는 거의 매일 혼자였으니까,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까.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니까. 떠돌아다니니까. 이모가 말들을 쏟아내고 동시에 나는 나와 수영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틀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누구든지 대체할 수 있는 자리라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차라리 그 자리를 대신 메꾸고 싶더라고. 어디든지 부담 없이 떠돌아다니라고 말이야.”
주변 사람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망쳐 버린 그 자신을 위할 줄 아는 사람.
“다시 한가람으로 돌아와 줘.”
내 부탁에 돌아올 이모의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모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부럽다니까. 나도 마술이 하고 싶다고.


이모는 흐노니를 마술이라고 불렀다. 완벽한 흐노니가 되어 병에 걸린 사람의 감정을 신기루처럼 사라지게 하는 일. 이모는 극장에 오영현을 꼭 부르라는 말과 함께 안경을 한 번 더 치켜 올렸다. 오영현이 돌아와도 이모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흐노니로 생활할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 짐작은 완전히 틀렸다. 그곳이 어디든 따라해야 할 것이 누구든 이모는 흐노니 일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말이다. 흐노니, 미처 그리워 동경하는, 곧 사라질 것 같은. 흐노니… 아마 이모는 누군가를 위해서라도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럴 테다.

새장에 넣어놓은 비둘기가 푸드덕거렸다. 마리가 생각났다. 이모는 오영현에게 티켓을 보내라는 말을 강조했다. 온 객석에 종잇조각이 떨어져 내릴 만큼 화려한 공연을 만들 셈이었다. 공연용 비둘기도 있는 대로 동원할 생각이었다. 날개가 부러진 마리가 바닥에서 모래를 헤집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마음을 바로잡았다. 마술을 해야만 했다. 연습실의 칠판 달력에 서로가 피날레를 맡는 공연 날짜가 적혀있었다. 이번은 나였다. 극단의 사람들이 입을 모아 나를 피날레로 세웠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은 수영에게만 말했는데, 이상했다. 보드마카가 다 떨어졌는지 적혀있는 내 이름이 유난히 흐렸다. 가까이 다가가 그 흐린 글씨 위에 내 이름을 다시 적었다. 김유원. 흐려 사라지지 않을 이름이었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칠판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유난히 굵은 글씨로 쓰인 그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러보았다.

매번 입는 옷인데도 오늘따라 낯설었다. 반짝이는 의상을 여러 번 매만지는 바람에 넓은 레이스 소매 한쪽이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수영이 나중에 꿰매 주겠다며 테이프를 들고 와 손목을 칭칭 동여맸다. 인기척에 뒤를 돌았다. 이모가 서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오영현이 내가 입던 옷을 입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마술을 하느냐 물었다. 작은 극단에서 배우고 있어요. 나는 오영현을 바로 쳐다보았다. 부모님이 찬성하는 눈치는 아니던데. 내 전부를 아는 것처럼 말하는 그녀 뒤로 수영이 다가와 손짓을 했다. 시작하라는 뜻이었다.
“마술사니까요.”
오영현은 내 말에 잠자코 제 발끝을 바라보더니 관객석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오영현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오영현은 나보다 몇 살이나 많을까. 그녀는 내가 아직 넘지 못한 스물의 문턱을 이미 넘어있을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오영현의 나이가 되어도 마술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마술용 장갑을 꼈다. 오영현은 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마술을 해야만 했다. 마술에 대해서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무대 뒤에 세워두었던 가면을 얼굴에 얹었다. 가면 안에서 되돌아오는 콧김이 콧잔등을 데웠다. 순간, 나는 피날레의 주인공이 어떤 규칙으로 정해지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피날레. 내내 어둠 속이던 시야가 빛으로 환하게 찼다. 교복을 입던 것이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내 대각선에 앉은 아이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화요일 시간표, 급식 순서. 교과서들…수많은 생각들이 파고들어 땀이 비져 나왔다. 비져 나온 생각들을 겨우 집어넣었다. 언젠가 파열음을 내면서 터질지도 모르는 것들이었지만 그 속에서 또 어떤 반짝이는 것들이 쏟아져 나올지 몰랐다. 내가 포기한 것들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나만이 알 수 있었다. 후회는 없었다. 나는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천의 끝자락을 들고 바람을 불자 불길이 치솟았다. 머리에 썼던 모자를 벗고 관객석을 돌아다니며 관객들에게 모자 속에 소지품을 넣도록 유도했다. 많은 사람들이 반신반의하며 모자가 무거워질 만큼 본인의 소지품을 넣어주었다. 떨리는 손으로 모자를 날려 보냈다. 폭죽과 색종이들, 반짝이는 가루들이 터져 나왔다. 펑. 퍼엉. 펑. 이어 관객석에서 큰 함성이 들려왔다. 여느 때와 같이 좁은 소극장은 사람들의 함성을 더 잘 모아주기 마련이었다. 나는 손을 뒤통수로 뻗어 가면을 고정해두었던 끈을 잡아당겼다. 가면이 어깨에 한 번 부딪히고 발밑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이 더 큰 소리로 함성을 질렀다. 얼굴에 맺힌 땀을 문질러 닦았다. 순간 어둠속에서 오영현과 눈이 마주쳤다. 오영현은 나를 보더니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셋째 손가락과 넷째 손가락을 구부린 내 손 모양을 천천히 따라하는 중이었다. 무언가를 베끼는 사람처럼.

오영현은 나를 보는 대신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종잇조각들을 바라보며 손을 움직였다. 셋째 손가락은 약간 휘어져 있었고 넷째 손가락은 덜 굽혀져 있었다. 다섯 번째 손가락은 왜 펴져 있는 거야, 나는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무엇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이 났다. 나는 셋째 손가락과 넷째 손가락을 구부린 채 들고 있던 손을 공중으로 한 바퀴 돌려, 허리와 함께 숙이며 배꼽 위에 가져다 댔다. 숙인 고개에서 바닥으로 땀방울이 떨어졌다. 그동안 채 날아가지 못한 몇 개의 종잇조각들이 오영현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첫 번째 피날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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