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여성철학자인 내가 최근의 젠더 트러블에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언론을 타고 ‘사건’으로 부상했을 때부터이다. 현란한 이론에 갇혀 정작 디지털매체를 중심으로 세상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주위의 따끔한 조언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현실은 내가 알던 현실이 아니었다. 방송, 라디오, 영화, 사이버 공간은 모두 이미지로 가득한 세상이었고, 수없이 반복 회전되는 이미지로 구축된 ‘도시 상상계(the urban imaginary)’가 우리의 삶을 규제하고 있었다. 아니 도시 상상계가 제공하는 인지적 정신적 지도에 따라 우리의 몸을 끼워 맞추고 있었다. 회전율이 높은 이미지는 곧 우리의 젠더 정체성, 로맨스, 성적 욕망을 생산해 내고 있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이미지와 현실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곧 현실이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남성 중심적 온라인 커뮤니티가 남성 피해자 이미지를 순환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용자들은 이미 성평등은 이루어졌으며 데이트 비용이나 군대 문제 등 남성들이 오히려 역차별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화 <국제시장>의 아버지, 뉴스를 장식하는 실직한 남편의 이야기는 이들에게 곧 현실이었다. 피해자의 불안은 여성혐오로 나타났다. ‘김치녀’나 ‘꼴페미’는 상종 못할 가해자로 혐오된다. 이 이미지는 그대로 청년층에게 스며든 듯하다. 2016년 여가부의 통계에 따르면 나이가 어려질수록 남성들은 여성차별이 없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으며, 5년 안에 역차별이 나타날 것이라는 대답도 상당수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의 임금이 남성의 64%밖에 되지 않는다거나 압도적인 여성 비정규직 비율을 보여주는 방식은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남성 이용자들은 ‘팩트’를 강조하지만 어디까지나 남성 피해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선에서만 받아들인다. 이른바 ‘정보 편식’인 것이다. 성폭력 사건은 ‘꽃뱀’ 이미지를 회전시키는 것으로 종결된다. 최근 네이트판에 올라왔던 한샘 성폭력 사건(한 신입 여성이 사내에서 세 남성에 의해 성폭력 당한 사건)에 달린 수많은 댓글은 꽃뱀을 언급하고 있으며, 급기야 한 뉴스는 무고죄에 대해 알아본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보여주는 모든 정보들을 기각하는 사람과 합리적인 논쟁이 가능하겠는가? 따라서 메갈리아는 피해자 위치를 탈환하기 위해 강력한 미러링의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남충’이든 ‘소추’든 그것은 여성혐오적 상상계를 뒤흔들기 위한 이미지 전략이었다.

그래서 모든 여성들이 순수한 피해자라거나 모든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디지털 매체에 의해 무한 순환되는 ‘남성 피해자 이미지’에 의해 여러분의 감정과 판단이 좌우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한 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도시 상상계에 의해 여러분은 희롱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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