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한 신체 접촉에 대해서는 입에 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 외에 지금까지 제가 적은 P선배의 성희롱은 거의 귓속말로 이루어졌고, 더 불쾌했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학과 행사에 오는 게 매우 화가 납니다. 하지만 마땅한 증거도 없어 고소절차를 밟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여기까지는 대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P선배, 저는 당신을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습니다. 또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비슷한 피해를 입을까 두렵습니다. 당신이 앞으로 다시 학과 행사에 오는 일이 생긴다면 즉시 학교 내 공론화를 진행할 생각입니다.”

위 글은 우리대학 S씨가 작성한 글의 일부이다. S씨는 술자리에서 성추행을 당했지만, 대부분의 성폭력 사건이 그렇듯 증거가 부족했다. S씨는 절망스런 마음에 여성폭력상담 및 피해자를 지원한다는 ‘한국 여성의 전화’에 전화를 걸었다. S씨는 상담원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상담원은 S씨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S씨는 상담원에게 “다른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기를 원해서 학과 구성원들에게 이 사건을 알리려 한다”며 “글을 미리 써두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상담원으로부터 의외의 말이 들려왔다. “이미 글을 올리신 건 아니죠? 성폭력을 당한 사실을 주변에 알리면 가해자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할 수 있습니다.” S씨는 머리가 멍해졌다. S씨는 이미 몇 명의 사람에게 당시 상황을 전한 상태였다. 전화를 끊고 주변에 물어보니 성폭력 사실과 가해자의 실명을 SNS에 게재했다가 명예훼손으로 신고 당했다는 지인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명예훼손은 진실이든 허위이든 공연히 사실을 적시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 책임을 지는 것이다. 사실을 공론화해도 법원은 ‘타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해 책임을 지울 수 있다. 이것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이다. 한국에서 이는 민법상 불법행위로 금전배상도 가능하며 형법상 명예훼손죄를 통해 형사적 제재도 가하고 있다.
다행히 S씨의 사례의 경우, 아직은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 S씨는 이후 상담원으로부터 “주변의 몇몇 친구에게 말하는 것은 괜찮으나 SNS에 올리는 일은 자제해야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우리대학 법학전문대학 김희균 교수에 따르면, ‘전파성 이론’이 있어 사실을 적시한 것이 몇 사람에게만 국한된 경우는 처벌하지 않고, 전파될 위험성이 있을 경우에만 처벌할 수 있다. 즉, 한 사람에게만 말하거나, 여러 사람이더라도 전파가능성이 없는 지인들에게 말하는 것은 명예훼손이 아니지만 언론이나 SNS를 통해서 적시하는 것은 현행법상 명예훼손에 해당한다.

김 교수는 “명예훼손죄의 요건에 부합한다는 뜻이지, 최종적으로 범죄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고 밝혔다. 형법 이론에서는 범죄가 되려면 그 적시 행위가 위법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위법성’은 적극적 개념이 아니라 소극적 개념이다. 형법 규정을 위반했지만 ‘그것은 정당한 일이었다’는 판단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김 교수는 “대표적인 것이 ‘정당방위’”라고 전했다. 이어 “물론 드물기는 하다”며 정당방위로 사람을 죽였을 때 범죄로 보지 않듯이 명예훼손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형법 규정을 위반해 명예훼손의 요건에 부합하더라도 특정 조건을 만족한다면 범죄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는 ‘사실성’과 ‘공익성’을 갖추어야 한다. 적시한 내용이 사실이어야 하며 공익을 위한 행위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원의 공공이익 여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 처벌 여부는 달라진다. 그러나 법원이 어디까지를 공익으로 판단할 것인지는 여전히 애매하다. 이러한 부담은 진실성과 위법성을 충족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입을 다무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든다. 미투운동이 시작된 후에야 수많은 성폭력 폭로가 이어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김 교수는 “대부분의 나라는 명예훼손을 형사사건이 아니라 민사사건으로 취급한다”며 “특히 사실 적시 명예훼손은 민사문제로 봐서 손해와 고의과실의 입증을 조건으로 배상책임을 지도록 한다”고 전했다.

유엔 시민적 정치적 권리규약 위원회(UN Human Rights Committee)는 2015년 한국 정부에 인권정책의 변화를 촉구하는 최종 권고문을 발표한 바 있다. 위원회는 ‘형법상의 명예훼손’ 항목에서 진실인 언사마저도 공익을 위하려 구사되지 않는 한 형사처벌 될 수 있는 점에 우려를 표했다. 위원회는 대한민국 정부가 명예훼손의 경우 민법에 의한 제재가 가능하므로 비범죄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진실을 항변하는 데 있어서 또 다른 조건이 부가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요건인 ‘사실성’을 증명하는 것도 성폭력 사건에서는 쉽지 않다. 성폭력 사건은 유죄판결을 받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2017년 범죄 발생 검거 및 처리 통계에 따르면, 성폭력으로 기소된 사건 중 25% 가량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전체 형사 사건에서 무혐의 비율은 17% 정도로, 성폭력 기소건에 비해 낮은 편이다. 김 교수는 “성폭력이라면 성폭력 피해자 역시 고소당할 것을 무릅쓰고 사실을 밝혀야 하는데, 명예훼손의 부담까지 지우는 것은 심한 것 같다”는 생각을 밝혔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꽃뱀이다”, “더럽혀졌다”는 말을 서슴치 않는 세상에서 2차 피해를 감수하고 피해 사실을 조작할 여성은 많지 않다. 게다가 2017년 한국 여성의 전화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전체 성폭력 피해 사건의 85%는 가해자가 피해자의 지인이었다. 모두가 인정하며 의심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성폭력’ 보다는, 한쪽은 ‘사랑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한쪽은 성폭력이라고 주장하는, 아름다운 성과 성폭력을 명확히 구별하기 어려운 사안이 많다.

성범죄 여부를 가르는 기준이 애매한 것에 비해 일부의 ‘꽃뱀’을 막기 위한 법률은 철저히 보장 받고 있다. 행위가 사실이든 아니든 명예훼손이 가능한 사회에서 성폭력 가해자들은 명예훼손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방법으로 명예훼손죄를, 재판 이후에는 자신을 고소했다는 감정적 이유로 무고죄를 주장할 권리를 가해자에게 준 것이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증명하기 어려운 것에 비해 가해 용의자에게는 너무 큰 무기를 쥐어준 셈이다.

여성학자 정희진 씨는 저서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보편적 인권 개념이 만들어낸 ‘성폭력 가해자의 인권’이라는 말은 ‘백인의 인권’, ‘자본가의 인권’이라는 말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몇천년 간 이어진 성별간의 권력관계를 무시한 채 ‘인권의 보편성’을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하면 결과적으로 사회적 강자의 이해를 실현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현재 성폭력 가해자와 가해 용의자의 인권은 명예훼손과 무고죄라는 이름 하에 피해 여성을 저격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인권은 국가를 상대로 주장돼야 하는 것이지 힘없는 피해자를 상대로 주장돼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임하은 기자 hani1532@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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