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1982년 6월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베이루트 지국장으로 여름 내내 그곳에 머물렀다. 그는 그해 8월 야세르 아라파트의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 전투부대가 그곳에서 철수하는 역사적인 장면을 지켜보았다.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허공에 갈겨서 그의 주위에도 탄피가 비 오듯 쏟아졌다. 프리드먼은 이 극적이고 비통한 장면을 열정적으로 써 내려갔다.

하지만 완성된 기사를 텔렉스로 뉴욕에 보내기 직전에 베이루트와 세계를 연결하는 통신선이 끊어지고 말았다. 프리드먼은 밤새 뜬눈으로 텔렉스 옆을 지켰지만 통신은 끝내 살아나지 않았다. 이튿날 뉴욕타임스는 아라파트의 베이루트 철수를 1면 머리기사로 올렸다. 하지만 바이라인은 그의 이름 대신 통신이 끊어지기 직전 기사를 전송한 AP통신이 차지하고 있었다. 무선전화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통신선 하나만 끊어지면 목숨을 건 취재도 빛을 보지 못했다.

나는 1988년 말부터 지금까지 29년째 기자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하나둘 쌓인 고생담 중 기억에 남는 건 대부분 기사 전송과 관련된 것들이다. 1999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리는 세계경제포럼 취재를 갔을 때도 통신 문제 때문에 갖은 고생을 했다. 취재신청을 늦게 하는 바람에 다보스에서 기차로 한 시간 떨어진 곳에 묵어야 했는데, 호텔에서 새벽까지 기사를 써서 전송하려 했을 때 출장 전부터 걱정했던 문제에 부딪혔다. 어찌된 일인지 내 컴퓨터 모뎀으로 신문사와 연결이 안 되는 것이었다. 결국 밤을 꼬박 새운 다음 거의 한 시간 동안 전화로 기사를 불러주어야 했다.

한 세대가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나의 기술적 플랫폼은 참으로 숨 가쁘게 바뀌었다. 지금 내가 들고 다니는 노트북은 1993년에 처음 지급받은 386노트북보다 정보처리 속도는 약 500배, 저장 용량은 1만 배 이상 뛰어나다. 날렵한 휴대폰 하나가 초기의 슈퍼컴퓨터보다 성능이 좋은 요즘 개목걸이 로불리던 삐삐와 벽돌 크기의 무선전화가 처음 나왔을 때를 상상하기는 어렵다. 이제 세계 어디를 가든 인터넷으로 거의 무한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다. 텔렉스가 끊기거나 모뎀 연결이 안 돼 기사를 못 보내는 일은 더 이상 없다.

그렇다면 기자들은 이제 고생 끝에 찾아오는 낙을 기대해도 좋을까. 오히려 그 반대인 것 같다. 기술적 플랫폼의 놀라운 진화 덕분에 기사 마감시간이라는 게 아예 없어지고 거의 스물네 시간 기사를 보낼 수 있는 (보내야 하는) 체제가 된 데다 어마어마한 컴퓨팅 파워와 초연결성을 인간보다 더 잘 이용하는 인공지능이 강력한 경쟁자로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미 어떤 기사는 나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게 쓸 수 있는 로봇 저널리스트들이 수두룩하다.

네덜란드의 체스 그랜드 마스터인 얀 도너는 컴퓨터와 체스 대결을 한다면 어떻게
준비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말했다. “망치를 갖고 올 겁니다.” 그럼 로봇 저널리스트와 경쟁해야 하는 나도 이렇게 말해야 하나.“로봇 저널리스트에게 망치를!”


장경덕(경영 85, 매일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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