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팔에는 100주년 기념로고가, 또 다른 한쪽 팔에는 18이라는 숫자가 박힌 과잠을 입고 삼삼오오 모여 중앙로를 걸어간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서울시립대의 신입생 18학번들의 모습이다. 대학에 입학해 막 첫 중간고사를 치렀을 18학번 새내기들에게 58학번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다가올까. 서울시립대라는 이름도 붙여지지 않았던 1958년에 우리대학에 입학했던 대선배님이 계신다. 서울농업대학 학생에서 서울시립대 100주년 발전기금의 고액 기부자가 되기까지. 우리대학의 과거와 역사를 함께해온 이성수(수의 58) 씨를 만나봤다.

▲ 이성수 동문(왼쪽)과 이성수씨 부부가 동네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울리던 종(오른쪽)

고생했던 학창시절

이성수 씨는 어렸을 적 국민학교마저 늦게 들어가야 했을 정도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 후손이 없어 고민이던 종가집에 양자로 들어가면서야 겨우 학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입시에 대한 부담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이성수 씨는 “사실 다른 학교 의과 계열을 굉장히 희망했어. 그런데 (의과대학은) 원서비나 학비도 비싸고 전공책 한 권이 쌀 한가마니 값이었어. 또 내 실력을 따져 봐도 겁을 먹은 것도 있지.” 건국대 수의학과도 없던 시절, 그는 결국 공립대학인 서울농업학교 수의학과에 원서를 넣었고 합격했다.

대학에 붙고서도 이성수씨의 부단한 노력은 계속됐다. 그는 오전 수업을 놓치지 않기 위해 평일이면 새벽 5~6시에 일어나 경기도 화성에서 수원역까지 걸어갔다. 수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서울역에서는 청량리역으로 전차를 탔다. “전철도 아니고 전차야, 전차.” 당시 시속 7km의 속도의 전차를 한 시간 넘게 타면 당시 종점이었던 청량리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남보다 먼저 강북이 개발되고 있던 시절, 청량리의 모습은 어땠냐는 질문에 “청량리역은 단층인데다가 완전 움막 같았지. 주변에는 판자촌이랑 술집만 있었어. 지금은 도로도 잘 돼 있고 버스도 다니지만 그땐 거기서부터 경희대 주변까지도 완전 논밭이었어.” 그렇게 청량리역에서 논두렁을 헤치며 30~40분 걷다보면 이성수 씨의 험난한 등교길이 끝나곤 했다.

당시 우리대학엔 배봉사라는 이름의 기숙사가 있었다. “왜놈들이 지어놓고 간 기숙사가 있긴 했는데 너무 비쌌지.” 당시 학교 유일의 식당은 기숙사 식당이었지만 일반 학생들은 배식을 받을 수 없었다. 이성수 씨는 “시립대 주변에서 가정교사를 해갖고, 공부 가르치면서 밥 먹고 다녔어”라며 그렇게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오후 5~6시가 다 돼 있었다고 전했다.

이성수 씨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겠다는 생각에, 주말에도 집이나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곤 했다. “전문 용어들이 전부 영어라서 영어 원서로 공부했는데, 그게 얼마나 어려워.” 그는 당시 공부하던 전공 책들을 보여주며 “괜히 버리질 못하겠더라고”라며 웃었다.

당시에는 수의예과를 졸업하면 수의학사 자격이 주어져 보건대학원 입시 자격이 주어졌다. 이성수 씨는 우리대학을 졸업한 후, 학업을 이어나가고 싶어 서울대 보건대학원에 지원해 입시 시험을 치르게 됐다. 하지만 며칠 밤을 새며 공부했던 탓일까, 이성수 씨는 시험 도중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고 결국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감독관이 달려와서는 당시 보건대학원장을 불러왔다. 그는 이성수 씨를 진단하더니 무언가를 마시게 했다. 이성수 씨는 “그게 커피였어, 커피. 얼굴 노래지고 피로 때문에 쓰러진 걸 아니까 커피를 마시게 한 거지”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 이성수 씨 부인의 모습, 이성수 씨는 사회공헌으로 지역 신문에 크게 실린 사진을 보이며 자랑했다.

공무원에서 부농으로

“첫 발령을 양주로 받았어. 수의학과를 나왔으니까 나는 축산 쪽을 담당했지. 당시가 낙농산업을 정책적으로 장려할 때였어.”
이성수 씨는 우리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국가공무원이 됐다. 이성수 씨가 축산분야 공무원으로 재직했던 1960년대는 정부가 축산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개발하던 때였다. 1962년부터 종합적인 경제개발 계획에 축산이 포함됐고, △젖소 사육 권장 △우량 젖소 도입 △국산 유제품 권장 등의 내용을 담은 낙농장려10개년계획이 추진되기도 했다.

“종축장에서 소를 배정하는 업무를 맡았어. 종축장에서 기르던 젖소들 중 암소 한 마리를 데려와 하숙집 처마 밑에 울타리를 치고 길렀지. 아침 일찍 일어나서 풀 깎아 놓고 출근하면서 주인할머니한테 물 떠놓아 달라 부탁하고. 퇴근하면 내가 관리했어. 동네 사람들이 다 놀랬지. 직장 생활하면서 소를 키우니까.”
낙농산업을 장려하던 시대적 상황에 이성수 씨의 사업 수완은 적절하게 맞아 떨어졌다. 행운도 따랐다.

“처음 기르던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무게가 30kg가 나갔어. 아주 잘 나온 편이었지. 그 후로 쌍둥이를 두 번이나 낳았어. 그때부터 돈이 엄청 벌리기 시작한 거야. 당시에 소 한 마리에 논 한마지기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소 값이 무척 비쌀 때였어.”
그렇게 기르기 시작한 소 한 마리는 몇 년 후 65마리가 됐다. 이성수 씨가 낙농업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는 소문은 동네에 빠르게 퍼졌다. 이성수 씨는 “동네사람들이 나를 따라 너도 나도 소를 키우려 날뛰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성수 씨의 성공 사례는 1981년 MBC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 소개되며 사회적인 관심과 인정을 받기도 했다.

▲ 이성수 씨의 공덕비가 세워질 때 받은 표창장

사회공헌 활동도

자신의 성공이 오롯이 스스로의 능력 덕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성수 씨는 지역 사회에 공헌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했다.
“당시는 다들 못 살던 때니까. 돈을 많이 벌게 되면서부터 동네에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한테 라면도 사다주고 쌀도 사다주기 시작했어.”
이성수 씨는 고등교육을 받는 사람이 소수였던 시대에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수료한 학자이자 축산업 장려와 영농교육을 담당하는 공무원으로서 농촌지도자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이 젖소를 키워 농가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고 서울 각지를 돌면서 자신의 낙농 성공 비결에 대한 강연을 했다. 이성수 씨가 30년간 머물던 공직에서 퇴임하던 1995년, 남양주 와부읍 지역 주민들은 이성수 씨의 농촌지도, 낙농발전선행, 영세민 돕기 생활화 등 지역 사회 공헌 업적을 기리는 공덕비를 세웠다.

이성수 씨의 부인인 이정자 씨 역시 농촌 사회 발전에 힘썼다. 여성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조차 힘들던 시절에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여성 인재였던 이정자 씨는 지역 계몽단체 활동을 하면서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60년대는 면에서 근무하는 여성 직원이 한 명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여자 공무원이 거의 없을 때였는데 그때 아내가 면에서 근무를 했었지. 아내도 좋은 일을 많이 했어. 60년대만 해도 국문을 아는 사람이 적었는데 아내가 문맹퇴치를 위해서 동네사람들한테 글을 가르쳤어.”
이성수 씨의 집에는 부인 이정자 씨가 한글 수업을 진행했을 때 사용하던 종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성수 씨는 “이렇게 종을 치면 동네 사람들이 글공부하려고 모여들었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이런 이정자 씨의 이야기는 1992년 경기일보에 ‘농촌계몽에 청춘 불사른 여성 선각자’라는 제목의 기사로 소개되기도 했다.

이성수 씨는 지난해 우리대학에 8천7백만 원 상당의 발전기금과 350만원 가량의 100주년 기념관 건립 기금을 기부했다. 이성수 씨에게 고액의 발전기금을 기부할 만큼 학교에 대해 애착이 큰 이유를 묻자 “수의학과를 나온 덕분에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다”고 대답했다.

“내가 원래 하고 싶었던 대로 의대에 진학해서 박사가 되고 했더라도 그렇게 성공하지는 못했을 거야. 우리나라에 박사들이 좀 많아? 비록 서울농업대학을 차선으로 선택하긴 했지만 내가 지금처럼 모교에 기부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한 건 다 우리대학 덕분이야. 그럼 이렇게라도 내가 번 돈을 환원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
우리대학은 이성수 씨가 다녔던 서울농업대학에서 시작해 서울산업대를 거쳐 현재 서울시립대의 모습으로 100년을 맞았다. 이성수 씨에게 어느새 100주년을 맞은 우리대학이 미래에는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지 물었다.

“무엇보다 공공의과대학이 만들어져야 한다. 공립대학으로서 공공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 시에서 보다 많은 지원을 해줘 의대를 꼭 만들었으면 좋겠어. 공공의대와 보건소 등이 생기면 지역주민들에게 공헌할 수도 있을 거고. 의대 각처에 시립대의 인재들이 많이 풀어져 활용될 수 있을 테니 우리대학이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거야 ”
이성수 씨는 인터뷰를 마치며 지금 학교를 다니는 후배들에게도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80년 인생 속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는 “무엇보다 경험이 중요해. 인생을 사는데 공부도 중요하지만 경험이 없으면 무식해. 경험이 많아야 응용력이 생겨”라며 젊은 날의 고생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하물며 자취생에게 익숙한 계란후라이를 요리하는데도 응용력이 필요하다며 “응용력 없는 사람은 계속해서 불조절도 못하고 계란을 설익히거나 태워먹기만 하지”라며 후배들이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실패를 통해 배워나가는 것을 일상화하면 좋겠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이성수 씨는 “요즘 젊은이들이 머리가 좀 좋아? 우리나라가 IT나 4차산업 같은걸 세계적으로 이끌고 있잖아”라며 노인인 자신이 사실 우리대학 학생들에게 해 줄 조언은 많지 않다고, 이미 잘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성수 씨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남양주에서 돌아오는 길, 버스와 지하철이 새삼 편리하게 느껴졌다. 옛날에, 기자와 같은 학교를 다녔던 동문의 말을 적은 수첩을 펼쳐봤다. 그 속에 담긴 우리대학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새삼 한번 훑어봤다. 학교에 돌아가면, 뭔가가 평소와는 달라 보일 것 같았다.


인터뷰_ 윤유상 기자 yys618@uos.ac.kr
정리_ 김수빈 객원기자 vincent0805@uos.ac.kr
정리_ 서지원 기자 sjw_101@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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