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자취, 그리고 사람들

‘시대와 더불어 민중과 함께’


▲ 현재 학생회관-배봉관 사이에 있는 학생운동 비석
학교 중심에 자리 잡아 우리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기념비는 무엇일까? 이 기념비는 우리대학의 남다른 학생운동 역사와 관련이 깊다. 우리대학도 한 때는 뜨거운 학생운동의 ‘성지’였다.

1964년 3월 무렵, 서울에서 4.19 혁명 이래 최대 규모의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바로 ‘한일협정반대운동’이다. 우리대학에서도 1965년 6월 22일, 2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한일회담 반대 성토대회가 열렸다. 취지발언과 선언문 낭독 후 결의문을 채택한 학생들이 대열을 갖추고 교문을 나섰다. 학생들은 서울대 문학부(현재 대학로) 부근까지 이르렀으나 경찰들의 강제 진압으로 부상자 10명, 연행자 142명의 희생이 초래됐다.

한일협정 반대운동 이후 학생운동이 사그라지는 분위기가 지속되다 1980년 12월 12일 신군부 세력의 군사반란 후 다시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2일부터 시작된 ‘민주화 운동기간’동안 우리대학 전체 2,000여 명의 학생 중 절반이 넘는 1,000여 명이 5월 첫 주간 연일 집회에 참여했다. 역사적인 5월 15일 서울역 집회에서도 우리대학은 오전 학내집회를 마치고 서울역으로 대거 참여했다. 우리대학 학생 700여명은 교문을 막고 있는 경찰을 뚫고 청량리에서 신설동으로 나아갔고, 겹겹이 가로막은 경찰 저지대를 넘어서며 서울역까지 진격해 성공적으로 집회에 참여했다.
이러한 우리대학의 민주화를 향한 열정은 6월 민주항쟁까지 이어지게 된다. 전대협 동우회에서 출판한 ‘불패의 신화’에서는 6월 민주항쟁 시기 가장 격렬한 시위대열로 서울시립대와 고려대를 선정했다.

우리대학은 민중의 시대 속에서 민중과 함께 ‘민중시대’로서 적극적으로 민주화에 노력한 과거가 있다. 시대가 지나 독재정권 시기만큼의 격렬한 학생운동은 불필요하게 됐지만 아직도 그 당시의 고난과 역경이 담긴 역사는 우리대학 몇몇 과들의 대학구호(FM) 속 단어들과 기념비로 남아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글·사진_ 손명훈 수습기자
smm0038@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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