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자취, 그리고 사람들

<도시행정학과 최근희(도행 77)  교수 인터뷰>


 
대학생활 중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일화가 있나
전두환 독재 때 5.18 전까지는 다들 데모를 열심히 했다. 17일에 이화여대에서 학생회장단 모임이 있었다. 그런데 경찰이 그 모임을 포위하고 전부 체포하려 했다. 사실 그때까지는 데모를 해도 너무 심하지만 않으면 경찰들이 내버려 뒀다. 그런데 갑자기 ‘학생회를 포위하고 진압하려 한다’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국이 바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일이 일어난 거다. 광주 출신 선배가 고향에 전화가 안된다고 하더라.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었다. 그러면서 군부에서 계엄령이 떨어졌다. 신문은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고 보도했다.
우리대학에도 공수부대가 들어왔다. 정문으로 들어오려 모퉁이를 도니까 철조망 아래 장갑차 한 대가 서있고, 군인이 2m정도 되는 몽둥이를 들고 있던 장면이 떠오른다. 당시 모든 학교가 그랬다. 군부는 대학생들이 모이지 못하게 하려고 모든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나는 제대한 지 반년밖에 안 지났는데도 그런 상황이 무섭더라. 그런데 홍경의라는 친구는 그 와중에 학교에 몰래 들어와서 유인물을 복사하는 인쇄기를 빼내었더라. 놀라서 그걸 어떻게 가지고 나왔냐고 하니까 “군대 다녀왔잖아”라고 하더라.  이후 졸업할 때까지 제대로 공부한 한 학기가 없다. 중간고사가 시작되는 4월 초쯤이면 데모가 시작됐다. 대학은 문을 닫았고 그렇게 수업이 중단됐다. 기말고사 시험이 레포트로 대체됐다. 8월 중순에 학교에서 레포트를 제출하라는 편지가 왔다. 그래서 어른들이 “저 놈들 공부하기 싫어서 데모한다”고 많이 했다.
그 당시에 대학생들이 많이 가는 곳은 종로였다. 그런데 군인들이 한 줄로 쭉 서서 검문을 하더라. 대학생 같은 경우에는 학생증, 주민등록증을 가져가서 확인했고 가방을 다 뒤졌다. 한 번은 교보문고를 가려는데 검문을 3번 받았다. 정말 힘들었다. 근데 그 당시에는 익숙한 일이었다.
나중에 보니 학교를 제대로 못 간게 인생에 있어서 큰 손해구나 싶었다. 유학을 가서 통계학을 배우는데 기초적인 것도 모르고 너무 어렵더라. 3학년 때 확률에 대해서 배우는데 5월 달에 학교 문이 닫혀서 못 배우고 그냥 끝나버린 거다.

당시 70~80년대와 지금의 우리대학은 어떻게 다른가
꾸준히 발전해왔다. 그 당시에는 과도 6개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 학생들은 고시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기술고시는 정원 15명 중 우리대학에서 5명이나 나온 적도 있고 행정고시 합격자 40명 중 5명 씩 붙기도 했다. 특히 도시행정학과 75학번이 그랬다. 75학번은 입학한 30명 중 고시 합격자가 10명이 넘는다.
사실 학교 교육시설이나 이러한 것들은 형편없었다. 그 당시에는 규모가 많이 작았기 때문이다. 한 번은 2월 22일 쯤에 졸업식을 하는 것을 봤는데 전농관 뒤에 있는 주차장에서 하더라. 졸업생의 숫자가 199명이었다. 인상 깊어서 아직도 그 숫자를 잊지 못한다. 전체 재학생들이 한 350명 쯤 됐고, 그래서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동아리 활동을 하신적은 없나
내가 만들었던 동아리가 있었다. ‘타임반’이라고 타임즈 기사를 읽고 해석하면서 국제 정세를 살피는 활동을 했다. 내가 교수로 부임한 후에도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졌다. 처음에 행정학과 친구랑 같이 만들었다. 그 당시에는 독재정권이었기 때문에 외국기사에 한국에 대한 안 좋은 기사가 나오면 면도칼로 다 오려냈다. 그래서 서점에 가서 너덜너덜한 책을 사오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 기사를 제대로 읽으려고 외국공사관에 가서 원본을 복사해 와 유인물을 만들어 돌려보곤 했다.

CC를 하셨다고 들었다
같은 과 80학번 친구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했다. 그 사람이 시립대학교 여학생 중에서 제일 먼저 고시에 합격했다. 국내에서는 네 번째 여성합격자이다. 그 사람은 외우는 것을 잘했다. 공무원이 되면 기계처럼 정해진 일만 하게 될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들을 많이 한다. 아마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장부터는 주체적으로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결정할 수 있는 것들이 생긴다. 우리 집사람이 한 일이 호주제를 폐지한 것이다. 그 당시 담당 국장이었다.

고시를 보기 위해 도시행정학과를 선택하셨는데, 왜 교수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됐나?
군대를 갔다오니까 모든 친구들이 한 명도 안 빼놓고 고시공부를 하더라. 그래서 ‘나는 조금 다른 길을 걷자’는 생각에 교수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우리대학 7급 공무원 특채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7급 공무원은 할 생각 안 했다. 다들 더 높은 급수를 준비했다. 7급 공무원 대우가 지금보다는 못 했고 학생들이 기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나도 사법고시를 공부했다. 딱 3개월 하고 포기했다. 외우는 것을 못해서 그랬다. 그래서 책을 친구한데 다 주고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주위 사람들이 “무슨 돈으로 가냐”고 물어봤다. 미국으로 가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장학금도 받았다. 그렇게 7년 동안 미국에 있었다. 미국에서는 생활비까지 지원받았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다.

시립대가 100주년을 맞아 나아가야 할 방향과 돌파구가 있다면?
100년사를 만들었다. 80,90년사와는 다르다. 전에는 대학의 전체역사 위주로 책을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36개의 과의 역사와 그 과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각 과에서 직접 작성하도록 했다. 그렇게 100년사를 두 파트로 나눴다.
100주년을 맞이했다는 것은 시립대학교가 그만큼의 연륜과 전통을 쌓았다는 것이다.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대학의 100주년이 역사를 회고하고 잘한 점, 반성할 점들을 회고하고 앞으로의 새백년에는 “어떤 대학이 되어야 할 것인가” 고민해 보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리·사진_ 박은혜 수습기자 ogdg01@uos.ac.kr
정리_ 임하은 기자 hani1532@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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