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자취, 그리고 사람들

▲ 농업고등학교 시기 학교 전경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이 노랫말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8.15 광복을 기념해 만든 ‘광복절 노래’의 일부이다. 광복은 우리 민족에게 기쁨과 희망을 가져다줬지만, 동시에 이념 갈등의 씨앗을 뿌리내리게 했다.

해방은 일본인 교직원이 대다수였던 경농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일본인 교직원 모두가 일본으로 돌아가 버리면서 교육에 차질이 빚어졌다. 조선총독부를 대신해 한반도 남부의 최고 통치기관이 된 미군정은 경농 교장에 이휘재 당시 교사를 임명했다. 미군정의 조치에 학생들은 강력히 반발했다. 학생들은 일제 치하에서 한국인 학생들을 잘 대해줬던 다른 교사가 교장이 되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학생자치회는 항의의 의미로 교장실 앞에서 통곡을 하고 상여를 매는가 하면, 이휘재 교장에게 사퇴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한편 사태가 계속됨에 따라 이휘재 교장의 임명 여부에 대해 학생들의 의견이 엇갈리게 됐고, 이는 교내 이념 갈등으로 번지게 됐다. 우익 학생들은 ‘민주학생연맹’을 조직했고, 좌익 학생들은 ‘학생전국통일위원회’를 조직해 서로 충돌했다. 해방 이후 이 두 단체 간의 충돌이 무려 13차례나 이어졌음을 통해 학생 간의 이념 갈등이 극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일찍이 1946년, 이름을 ‘서울공립농업중학교(이하 서울농교)’로 바꾼 우리대학은 중등교육기관에서 1950년 6월 10일 초급대학 인가를 받아 고등교육기관으로의 대전환을 시도했다. 하지만 보름 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교사(校舍)의 대부분이 파괴됐다. 우리대학이 정식으로 ‘서울농업대학’이라는 이름의 고등교육기관이 된 것은 휴전 후 1954년의 일이다.


한승찬 수습기자 hsc7030@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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