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자취, 그리고 사람들

전쟁의 시련과 학도호국단의 활동

27년간의 경성공립농업학교 역사는 1945년 해방을 맞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46년, 5년제였던 경성공립농업학교는 6년제인 서울공립농업중학교로 개명됐다. 농업중학교 시절에는 교육과정에 따라 하급과정인 1~3학년 학생들이 상급과정으로 진급하며 과를 선택할 수 있었다. 1951년에는 교육법개정으로 수업연한이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개편됐다. 이에 따라 학교는 고등학교와 중학교로 나뉘어 운영됐다.

▲ 원예학과 학생이 커다란 호박을 수확했다.
서울공립농업중·고등학교가 안정을 되찾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6.25 전쟁이 발발해 교사와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북한 인민군이 학교를 점령해 기숙사를 종합훈련소로 만들었다. 학교 시설은 큰 피해를 입었고 이를 복구하는 데 오래 시간이 걸렸다. 전쟁의 피해는 물품파괴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부 학생들은 북한 인민군에 의해 의용군으로 징집돼 전선에 투입됐고, 인민군 점령기간 중 학교가 궁금해 등교한 일부 학생들은 이후 그 책임을 추궁 받아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이렇듯 학교는 많은 시련의 시간을 겪어야 했다.

학도호국단은 1948년 정부수립 후 남북의 대치 속 국가 수호의 책임을 학생들과 함께 하기 위해 조직됐다. 학도호국단의 본래 목적은 비상시에 학생들을 동원하기 위함이었지만 점차 그 역할이 바뀌어 학생자치 기구로서 기능하게 됐다. 면학분위기 조성과 대민봉사와 같이 학생회의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이후 민주적 조직으로 개편된 학도호국단 산하에서는 기획·기록반, 연극반 등이 조직돼 다양한 분야에서 학생활동이 이루어졌다.

대학 승격과 군사정부의 규제

인문숭상의 풍조로 농업중학교를 지원하는 학생들이 점점 줄어들었고, 학교 당국은 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초급대학으로 설립된 서울농업대학은 이후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되며 성장했다. 당시 서울농업대학의 학과는 원예학과, 수의학과, 농공학과, 양잠학과였고, 이후 농업경영학과가 신설됐다.

▲ 잠사학과 학생들이 누에고치를 선별하고 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학교는 또 한 번의 시련을 겪기도 했다. 군사정부는 대학 정비에 나섰고, 서울농업대학은 서울대학의 농과대학으로 병합될뻔 하기도 했다. 군사정부의 학생지도부는 학교생활 외에도 교외생활까지 철저하게 규제했다. 교내외 학생모임을 목적과 관계없이 허가제로 바꿨고, 다방, 당구장 출입을 금하는 등 학생들의 여가·취미생활을 통제했다. 이는 사회통제의 한 방편으로 학생지도를 생각했기 때문인데, 서울농업대학의 학칙에도 이러한 규제가 명시돼 있었다.

한편 서울농업대학은 서울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52년 교육자치제도가 실시됐고, 이에 따라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가 구성됐다. 서울농업대학은 대학으로서는 유일하게 예외적으로 교육위원회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됐다.


안효진 기자 nagil3000@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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