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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퍼나이어'의 아버지, 교수가 되다100년의 자취, 그리고 사람들
임하은 기자  |  hani1532@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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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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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환경공학부 박철휘(환공 74)  교수 인터뷰>


   
 
그때 우리대학은 지금과 어떻게 달랐나

서울산업대학교에 1회로 입학을 했다. 100년 동안 우리대학이 많이 변화했다. 그런데 44년 전 학교 앞이 지금하고 거의 비슷한 것 같다. 일단 우리대학 특징이 ‘앞이 번화하지 않다’ 이지 않나. 당시 우리대학은 농업대학이었다는 이유로 전원풍의 학교였다. 내가 학교 다닐 때 유일한 고층 건물이 전농관 하나 뿐이었다. 그 뒤편으로는 다 단층 건물로 오른쪽으로 가면 원예과에서 쓰던 실습장, 종묘장이며 잠사학과가 누에고치를 키웠다. 대학이 이런 모습이 아닐 것 같았는데…
44년이 지난 지금도 도시계획이 바뀌지는 않았는지 똑같이 돼 있다. 그래서 아마 우리대학 학생들이 공부를 다 잘하는 거 같다. 학생들이 공부 밖에 할 수 없게 만드는 분위기 같은 게 있다. 그때는 대학교 1학년 젊은 청년으로 막 진입한 상태에서 들떠있다가도 우리대학으로 들어오면 갑자기 흥분이 사라지면서··· 자꾸 젊은이 같지 않게 되는 거다. (웃음)

1회라면 선배들과는 어떻게 지냈나
1회로 졸업했을 때는 학생들끼리 서로 다 알았다. 전교생이라고 해봐야 몇백 명밖에 안 되니까 굉장히 친하게 지냈다. 다들 전원 풍경을 피해서 유일한 고층인 전농관 근처만 왔다 갔다 했다.(웃음) 학문적인 연결고리는 하나도 없었지만 수의학과 선배님들에게 학과 선배님처럼 의지했다. 그때는 교내에서 회식도 많이 했다. 막걸리 사가지고 배봉산에 가서 수의학과 선배들하고 우리 과학생들이랑 같이 맥주도 마시곤 했다.
100주년이라는 전통에 과도기가 있었지만 연결은 다 돼있었다. 학교는 농대에서 서울산업대학으로 바꿔 하드웨어적인 연결을 했지만, 소프트웨어적인 연결은 우리가 했다. 학교가 바뀌었다 하더라도 사이사이에 선후배 관계가 결속이 돼왔다. 이를 보면 대학의 주체는 학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100년의 역사 속 구성원 중에 가장 중요한 게 학생이다. 일단 학생이 있어야 건물을 짓고, 학생에 맞는 교수를 뽑게 되는 것이다.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돼 왔기 때문에 100주년이라는 역사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그때도 자취나 기숙사 생활을 했나
고향이 서울이라 통학할 이유가 없었다. 1970년대 당시 우리대학에 기숙사가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마산에서 온 친구가 그 기숙사에 살았다. 기숙사는 완전히 목조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 와보니 기숙사가 없어졌더라. 연기처럼 훅 하고 사라졌다. 기숙사에 불이 나서 전체가 다 타버린 거다. 마산에서 온 친구가 자기 짐이 다 탔다고 하길래 내가 “야 네가 가져온 짐이란 게 뭐가 있냐?”고 하자 그 친구가 “집에서 좋은 거 다 가져왔는데 다 탔다”고 말한 게 생각이 난다.(웃음) 그 이후로 기숙사는 없었고, 현재 생활관이 이후 처음으로 지은 기숙사이다.

학교생활 중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내가 우리대학 학생회장 출신이다. 학도호국단이라는 제도가 있었고 학도호국단 제대장이 지금의 학생회장이다. 5월 달에 학교 축제를 해야 하는데, 너무 조용한 학교라 축제를 제대로 기획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학교 안에 밴드가 없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이 있어야 파티를 할 거 아닌가. 처음에 음악에 소질 있는 사람을 모았는데 무슨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5명이 왔다. 청바지도 입을 줄 알고 오른 쪽에 체인도 하나 걸 줄 아는 학생들이었다. ‘우리대학에 이런 사람들이 다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한 번 시켜봤는데 엉망이었다. 락밴드 ‘송골매’의 전신 ‘활주로’ 라는 밴드가 있었는데, 그 밴드를 불러 1대 1로 교육을 받았다. 일주일 동안 배운 후 전농관 앞에서 공연을 했다. 그때 만들어진 락밴드가 현재 중앙동아리 ‘제퍼나이어’이다. ‘제퍼나이어’라는 이름도 내가 지었다. 나는 꼬마였고, 꼬마 입장에서 사전을 쫙 찾았더니 ‘제퍼나이어’라는 단어가 멋져보였다. 히브리어로 예언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도 제퍼나이어의 지도교수다. 할아버지가 돼서 그런 거 하는 걸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하다고 그러는데 이상한 게 아니라 내가 그걸 만들었으니까 그런거다. 이 학생들이 나한테 계속 의지해서 나보고 지도교수를 맡으라고 한다. 그래서 이십 몇 년째 맡고 있다. (웃음) 제퍼나이어는 12월 말에 홍대 클럽 하나를 빌려서 자체 파티를 한다. 졸업한 사람들까지 다 온다. 그러면 제퍼나이어 초기 멤버 중에 75학번 동문이 하나 있는데, 그 친구도 지금까지 무대에 선다.
그 밖에도 많은 행사들을 했다. 축제 마지막 날 저녁에 캠프파이어를 하려는데 불붙이는 걸 어떻게 더 멋있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결국 전농관 4층에서 철사를 내려서 장작에 묶어두고, 솜방망이 하나 달아 휘발유를 잔뜩 묻힌 다음에 불을 붙였다. 그걸 철사를 따라 쭉 내리니까 하늘에서 불이 날아오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더라.

CC도 해보셨는지 궁금하다
당시 토목공학과도, 도시행정학과도 여학생이 얼마 없었다. 나는 시립대가 그래서 싫었다.(웃음) 어쨌든 그 당시 여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입학 전체가 300여 명 중에 여학생이 50명도 안 됐을 거다.

후배이자 제자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다면
과거에는 학생들이 우리대학에 만족하지 못했다. 학업성취도가 올라간 건 우리가 한 거지. 학교가 해 준 게 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우리대학의 면모를 보면 하나하나가 예사로운 일이 없다. 그래서 지난 44년이 헛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학생들이 다 잘하는데 다만 더 큰 뜻을 갖고 펼치는 데에 약한 부분이 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더니 전농골의 조용한 분위기 때문이다. (웃음) 그래서 100주년 이후에는 우리대학이 어느 사립대학보다도 더 크게 펼칠 수 있는, 환하고 밝은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기를 바란다. 또 공부만 할 것이 아니라 교외활동, 국제학생교류, 기관에서 하는 프로그램 등에 다양하게 도전해서 “내가 할 일이 크게 펼쳐져 있다. 내가 그런 일의 리더가 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정리·사진_ 임하은 기자 hani1532@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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