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자취, 그리고 사람들

▲ 경농 시절 상급생의 얼차려
우리대학의 전신인 ‘경성공립농업학교(이하 경농)’는 1918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설립됐다. 식민지 최고 통치기관이 세운 학교인 만큼 교직원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하지만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대부분 한국인이었고 일본인 학생들은 소수였다. 내지와 외지를 구분했던 일본의 식민지 교육 특성상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에는 차별이 존재했고, 이는 한국인 학생들의 저항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한국인 학생들의 저항의식을 보여주는 사례로 1930년 ‘경성농교생 동맹휴학 사건’을 들 수 있다.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떠난 경농 2학년 학생들은 개성의 고려 왕궁 유적이었던 만월대에서 식사시간을 가졌다. 그러던 중 식수가 부족했던 한국인 학생들이 넉넉한 식수를 가진 일본인 학생들에게 물을 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일본인 학생들이 이를 거절해 둘 사이에 시비가 일었다.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이들의 다툼이 격화돼 결국 학교 당국이 개입했다. 학교는 다툼에 휘말렸던 학생들 중 한국인 학생만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경찰 또한 사건 가담자 중 한국인 학생만 불러내 조사했다. 학교와 경찰의 불공정한 대우를 받은 한국인 학생들은 이에 맞서기 위해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경농의 재학생 91명 중 한국인 학생은 83명이었고 이 중 56명이 동맹휴학에 참여했다.

학교 측은 동맹휴학 참여자를 퇴학과 무기정학 처분으로 대응했다. 결국 동맹휴학 참여자 중 12명이 퇴학을 당했고, 38명은 무기정학을 당했다.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학교 측의 가혹하고 불공정한 태도는 이후에도 계속됐지만 동맹휴학 사건 이후에도 한국인 학생들은 차별대우에 강하게 저항했다.

우리대학의 설립목적이 일본 제국주의의 경제적 수탈을 위한 것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경농의 한국인 학생들이 정의감을 가지고 식민지 교육의 불의에 맞섰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승찬 수습기자 hsc7030@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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