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자취, 그리고 사람들

▲ 현재 청량초교 자리에 가장 처음 지어진 경성공립농업학교 초기의 교사
우리대학은 1918년 개교 이래로 많은 변화를 겪으며 성장해왔다. 우리대학의 모체로 일제강점기에 개교한 경성공립농업학교는 일제의 식민지 농업·교육정책에 의해 설립됐다. 일제는 1910년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후 농업정책으로 식량증산사업을 벌였다.

수탈을 위한 학교의 설립

일본은 품질 좋고 저렴한 조선 쌀뿐 아니라 면화, 누에고치와 같은 원료를 수탈해 자국의 식량·자원부족을 해결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인의 기호에 맞는 일본 품종의 쌀과 누에를 한국에 퍼뜨리고, 재배방법을 교육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비옥한 땅 동대문 일대는 일제가 농업학교를 세워 목표를 이루기에 적절했다. 농사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선농단과 왕실의 밭인 적전이 있고, 대한제국의 황제 순종이 직접 밭을 가는 친경식을 행할 정도로 농업의 중심지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수업연한 2년에 2학급으로 시작한 경성공립농업학교는 수업연한 5년에 8학급으로 성장해갔다. 대표적 교과과정으로 농업과와 양잠과가 있었고, 일제의 산미증식계획, 남면북양 등 정책 변화에 따라 농업토목 전수과, 수의축산학과 등이 새롭게 등장하기도 했다. 시설의 경우, 경기도 종묘장 일대에서 개교한 이후 청량리, 전농·휘경정 등으로 신축 이전하는 과정을 거치며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모두 이익을 착출하고 황국신민화교육을 철저히 하려는 일제의 의도로 인한 것이었다. 이는 경성농립공업학교 내에 조선신궁 봉납 시설이 존재하는 등의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식민지 농업엘리트 양상기관

교육에서도 이러한 점이 그대로 나타났다. 먼저 근대적 농업기술과 농업경영 능력향상을 위해 이론교육과 실무실습이 중시됐다. 특히 실습교육량이 많아 중도에 퇴학하거나 전학하는 학생들이 발생했고, 가을에는 학생들의 결과물을 전시해 서로를 평가하는 농산물 품평회가 열렸다. 강도 높은 실습교육을 통해 확실한 농업기술자를 육성하려는 목적의 정책이었다. 농업정신에 투철한 식민지 중견엘리트를 양산하는 것이 경성공립농업학교의 교육방침이었던 것이다.

경성공립농업학교는 농민도의 실천을 생활화하기 위해 전교의 학생을 기숙사에 기거시키기도 했다. 기숙사는 온돌로 돼있어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했으며 목욕탕, 세면소, 취사장, 식당 등이 잘 갖춰져 있었다. 당시 이러한 기숙사 시설은 한국에서 가장 훌륭했다고 한다. 기숙사 복도에는 걸개에 개인 농구를 걸어둬 매일 존중심을 갖도록 했다. 기숙사에서의 식사는 취사반에서 자체적으로 메뉴를 정해 만들었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식사가 서로 달랐다. 항상 배가 고팠던 학생들은 철조망을 넘어 떡전거리로 나가 호떡이나 밥을 사먹었다고 한다. 전시체제가 강화된 1940년대부터 기숙사는 대대조직으로 개편돼 군대와 흡사한 집단이 되기도 했다.


안효진 기자 nagil3000@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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