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의 자취, 그리고 사람들

<국사학과 염복규 교수 인터뷰>


 
우리대학 100주년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있다. 국사학과 염복규 교수는 우리대학 100주년사를 공동 집필하고, 박물관장으로서 100주년 기념관 내 역사관을 준비하고 있다. 100년의 역사를 돌아본 염복규 교수를 인터뷰했다.

시립대학교 역사관은 어떻게 꾸며지나
기존 박물관 물건과 졸업한 동문들의 기증품들이 전시돼있다. 그 중 기억나는 전시물이라면 ‘수혼비’가 있다. 농업대학 시절, 100주년 기념관 자리에는 수의학과 건물이 있었다. 수의학과에서는 동물실험이 이뤄졌고 많은 동물들이 희생됐다. 그래서 수의학과가 사라질 때 동물들의 영혼을 기린다는 의미로 수혼비라는 비석을 세웠다. ‘짐승 수’(獸), ‘영혼 혼’(魂) 자를 따온 것이다. 얼마 전까지 미래관과 음악관 사이에 잘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에 있었는데 이번에 역사관으로 가져왔다.

100주년 역사 중 기억나는 사건이 있나
우리대학 역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대학은 공립학교였다. 엄밀히 따지면 일제가 세운 학교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던 이들은 우리나라 학생들이었다. 그 학생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별다른 항일활동을 한 적은 없었는지, 학교의 정체성을 찾을 때 이런 부분이 의미가 있다. 90년사를 쓸 때는 자료 정리가 부족해 항일 활동과 관련된 큰 사건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후 10년 동안 관련 자료를 많이 찾아냈고, 이를 박물관에도 전시할 수 있게 됐다. 1932년 당시 신문을 보면 경성농업학교 학생들이 ‘소척대’ 라는 민족주의 단체를 조직해 비밀 항일 활동을 하다 적발돼 처벌을 받은 사실이 기록돼있다. 동대문경찰서장이 총독부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소척대를 적발했다’는 내용의 문서도 발견됐다. 당시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된 학생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일제강점기 영화에서 보던 형무소 사진들이나, 수감자 카드 등과 같은 자료들을 찾았고, 덕분에 학교의 역사도 풍부해졌다.

역사관을 준비하면서 어려웠던 점이 있나
한국의 역사 기관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문제이기도 한데, 역사 자료, 기록을 관리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풍토가 한국에서는 거의 2000년에 와서 생겼다. 그래서 자료가 제대로 보관된 것이 별로 없다.
100주년 기념관 안에 처음으로 ‘학교 역사관’이라는 이름으로 박물관 아래에 있는 조직을 만들었고, 직원도 배치했다. 이전에는 본부에서 자료를 보관하다가 보관할 주체나 공간이 불분명해서 중간에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다. 매년 생산되는 기록을 아카이빙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주체가 생겨서 앞으로는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대학은 계속 변화해왔다. 같은 학교라는 정체성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나
일제 강점기 당시 경성농업학교와 비슷한 위상을 갖는 농업학교가 전국적으로 많았다. 강원대나 경상대가 그렇다. 그러나 그런 학교들은 우리처럼 역사를 100주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도중에 학교 간의 합병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역사의 뿌리를 한쪽에 두기 어렵다. 따라서 학교의 역사적 출발점을 두 학교가 합쳐진 순간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우리대학에 합병 같은 굴곡이 없었다는 것은 우리대학이 내세울 점이다. 학교의 역사가 길다고 꼭 좋은 건 아니지만, 처음 농업학교에서 출발하여 2018년 현재의 시립대학교가 되는 동안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했고, 독자적으로 발전을 해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역사와 문화’ 교양 수업에서 우리대학의 역사를 다룰 예정이라고 들었다. 시립대의 100년의 역사와 서울의 역사는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
100년 동안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가 격변해왔다. 우리대학의 역사도 서울의 격변 과정과 맞물려있다. 20세기 서울의 변화를 외부의 여러 상황들을 통해서 살펴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대학의 역사를 확인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우리대학이 서울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 번 정도 그런 수업을 해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서울이라는 도시가 작았고, 근교에는 농업지대가 많았다. 50~60년대 초까지도 청량리 일대는 거의 농사짓는 곳이었다. 그런 이곳에 농업학교가 있는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 그런데 60년대 중반부터 급격한 도시화가 서울에서 이뤄졌다. 대도시 한가운데 농업대학은 시대와 안 맞는 측면이 있었다. 이런 것들이 반영돼 1974년에 학교 성격이 완전히 뒤바뀌어 ‘서울산업대학’이 됐다. 1980년대 이후에는 서울이 이전과 다르게 세계적 도시로 점점 성장함에 따라 산업대학 역시 농업대학처럼 뒤쳐진 대학이 됐다. 이에 종합대학교인 ‘서울시립대학교’가 된 것이다. 이처럼 서울과 우리대학 사이에는 일련의 맥락이 있다.

100주년을 정리한 담당자로서 미래에 대해 해주고 싶은 말도 있을 것 같다.
옛날 영화를 보다보면, 인물들의 옷차림이 지금과 굉장히 비슷한 경우가 많다. ‘역사’라는 게 일직선 방향으로 발전할 수도 있겠지만, 사회적인 유행은 돌고 도는 것이 많다. 학생들이 미래를 볼 때에도 너무 앞만 보지 말고,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예를 들자면 과거 1974년에 농업대학에서 산업대학으로 변신하면서 학과들이 폐지됐다. 그 중 환경원예학과는 농업대학부터 이어져온 유일한 학과이다. 당시 원예학과를 폐지해야 할지 의견이 분분했는데, 결국 도시과학대학에 속하게 됐다. 그런데 지금은 도시 발달이 하나의 임계점을 넘으면서, 도시 정책에서 원예가 중요한 트렌드가 됐다. 도시 안에 녹지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고, 도시에 텃밭을 가꾼다. 도시와 원예가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던 변곡점을 지나 다시 관련성을 갖게 된 때가 온 것처럼, 미래를 볼 때 한 방향만 보는 것보다 넓게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정리·사진_ 임하은 기자 hani1532@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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