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사를 써나간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이 세 화가가 어떤 그림, 어떻게 그려나가게 됐는지 화가들과의 가상인터뷰를 통해 알아보자.  -편집자주-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선(善)을 그린 화가, 박수근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임종을 맞아 남긴 마지막 말이다. 화가 박수근과의 가상인터뷰를 통해 그의 인생을 톺아 보았다.

선생님의 작품세계에 대해 알려주세요
일단 제가 주로 소재로 삼은 것은 주위 사람과 풍경들입니다. 빨래하는 아낙네,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처럼 주위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정경이지요. 저는 그림으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을 보듬고 싶었습니다. 화강석 위에 그려낸 것 같은 독특한 질감을 구사하는 제 화풍은 우리나라 회화 중 가장 토속적인 화풍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덕분에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에 주둔했던 미군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언제인지
한국전쟁 당시 저는 홀로 월남하여 가족들과 헤어지게 됐습니다. 하지만 극적으로 가족들과 상봉해서 서울 창신동에 작업실이 딸린 작은 집을 얻었을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행복한 가족생활을 하면서 안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제 꿈이었거든요. 또한 한국전쟁 휴전 이후 재개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제가 제출한 작품이 입선했을 때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국전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사람들에게 제 그림을 알릴 수 있게 돼 정말 기뻤죠.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바로 가족이었겠는데
맞습니다. 특히 제 아내가 제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이지요. 제 아내를 처음 본 것은 춘천에서 미술 공부를 하던 도중 잠시 아버지 댁에 왔던 때입니다.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는 모습에 반해 곧바로 청혼했습니다. 제 장인의 반대가 심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허락받았고 저는 아내에게 “내가 가진 것은 오직 붓과 팔레트 뿐이지만 당신의 영혼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 이후로 제 인생의 영원한 동반자가 됐고 제 작품이 빛을 발할 수 있게 해준 은인이 됐습니다.


 
어딘가 슬퍼보이면서도 힘있는 눈망울. 무언가 지쳐보인 듯하면서도 언제든 땅을 박차고 뛰어나갈 것 같은 다리. 이중섭의 ‘소’는 일제강점기라는 불우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우리민족을 상징하는 동물 중 하나였던 소를 그린 그림이다. 북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을, 전쟁중에 월남해 제주도로, 하지만 결국은 무연고자로 죽음을 맞았던 이중섭과 얘기를 나눠봤다.

선생님은 어떤 그림을 그리셨나요?
‘소’는 교과서에 등장하는만큼 누구나 다 아실겁니다. 제 그림의 기조는 서양미술의 인상주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야수파라 할 수 있습니다. 대상을 관찰하는 순간 느껴지는 강렬한 인상을 바로 그려내는 거죠. 거친 붓질로 그려진 대상은 현실과 다소 다른 모습을 갖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그림에서 새롭게 드러나는 성질이 있습니다.

일제를 선전하기 위한 화가로 일하기도 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친형이 징집을 막기 위해 저를 일명 총후화가로 등록했습니다. 하지만 전 저를 가르치셨던 미술 선생님 중 한 분이 “조선 사람은 조선 화풍으로 그려야한다”고 말씀하신 일을 한번도 잊지 않았습니다. 제 그림의 서명은 모두 한글로, 심지어는 친일 인물이 쓴 ‘중처럼 머리를 깎고…’라는 논설을 보고 서명을 한때 이둥섭으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인생에 있어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1955년, 여러 친구들의 도움 덕택에 제 이름으로 된 전시전이 서울 미도파백화점에서 열렸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열 수 있었던 전시전이라 뜻깊었습니다. 고맙게도, 저를 국민화가라고 불러주는 한국에서는 제 그림이 걸린 전시전이 열리곤 합니다. 저는 6·25 전쟁 당시 어머니를 북에 남겨두고 월남할 수밖에 없었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작품들이 뿔뿔이 흩어졌죠. 그런데 재작년만하더라도 미국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 개인이 소장했던 작품 등을 한데 모은 ‘백년의 신화’전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기도 했고 제가 한때 살았던 제주도에는 이중섭미술관이 건립되기도 했죠. 저를 잊지 않아줘 고맙습니다.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작 중에 가장 비싸게 팔리는 작품을 살펴보면 특이한 이름을 갖고 있다. 최근 약 85억원에 팔린 ‘30-II-72’부터 시작해 약 65억원에 팔린 ‘고요 5-IV-73’ 등. 이 작품들은 모두 근현대 추상화가 김환기의 작품이다. 근현대 미술품 낙찰가 1위에서 6위까지가 모두 김환기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김환기의 라이벌은 김환기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다.

선생님의 그림을 보면 다소 특이한 면이 많은데
그렇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제 후기 작품들은 거의 다 추상적인 선과 면, 점만을 담고 있죠. 하지만 젊었을 적엔 달항아리, 매화, 달 등 소박한 주제들을 나름대로 새롭게 해석한 반추상화를 그렸었죠. 그러다가 다양한 화풍을 만나게 됐고 추상화의 가능성을 발견해 심취하게 됐죠. 그림에 담고 싶었던 것이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이라면 모두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무언가로 우리민족 특유의 미감,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점점 더 제 작품을 추상화했을 뿐입니다.

민족과 시대를 잊고 관념의 유희에 빠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저는 6·25 한국전쟁도, 4·19혁명도 모두 겪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현실상을 극명히 그려내는 작품을 그려내지 못했으며, 추상 세계로 도피한 작가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글쎄요. 제가 비참한 시대를 끝내 그려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시대의 비극성과 참혹함을 보여준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화가들과 친분이 있으셨나요
이중섭 화가와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이 화가가 직접 조각한 파이프 담배를 제게 선물해준 적도 있죠. 한번은 제가 그만 이 화가를 다그치며 엉덩이를 걷어찼던 일도 있었습니다. 우리 둘이 다른 작가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의 일인데, 이 화가가 자신을 초대한 작가에게 선물 하나 사 줄 수 없는 현실이 슬프다며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겁니다. 이 작가는 참 감수성이 많은 친구였죠.


서지원 기자 sjw_101@uos.ac.kr
한승찬 수습기자 hsc7030@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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