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위안부' 기획 <전시 ‘최초의 증언자들’>

▲ 박물관 내 추모관, 사이마다 장미꽃이 놓여있고, 벽돌은 늘어가고 있었다.
“잊지 않겠습니다. 할머니들께도 진정한 해방이 오기를 바라며”, “#withyou, 기억하고 행동 하겠습니다”와 같은 응원의 말이 노란 나비 모양의 종이에 적힌 채 빼곡이 걸려있다. 한복을 입고 신명나게 춤을 추는 할머니와 일본군‘위안부’ 피해 증언들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번잡한 홍대입구역을 지나 마포08번 버스를 타고 골목길을 걸어 만날 수 있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의 담벼락 풍경이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일본군‘위안부’라고 불린 조선,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의 여성을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5월 특별전시 ‘최초의 증언자들’은 침묵을 깬 최초의 증언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다룬다. 전시는 김학순 씨를 미투운동의 선구자로 지목한다. 1991년 8월 14일은 김학순 씨가 일본군성노예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날이다. 8월 14일은 올해부터 우리나라 국가기념일로 지정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 됐다. 김학순의 고발에 용기를 얻은 호주의 얀 오헤른, 말레이시아의 로자린, 대만의 황아타오를 이어 전 세계의 여성들은 50년의 침묵을 깨고 용기를 냈다.

위안을 주는 여성을 의미하는 ‘위안부’(comfort woman)라는 용어는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나 단어는 역사적 개념을 드러내야 했다. 이를 위해 따옴표와 범죄의 주체인 ‘일본군’을 넣어 표현한다. 그래서 정식 명칭으로 일본군‘위안부’를 사용한다. 유엔특별보고관은 위안부 제도를 ‘전시 중 군대 성노예제’로 표현하며, 위안부라는 단어는 문제를 축소한다고 지적하며 위안소를 ‘강간센터’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의 종전 후 삶을 다룬 전시실이 발길을 붙잡는다. 고국으로 돌아온 피해자들은 ‘위안소’에서 얻은 후유증 때문에 고통스런 삶을 살았다. 피해자 김경순은 TV에 나온 총소리에도 졸도했고, 잘 살던 아들은 갑자기 신경발작을 일으켰다. 의사는 ‘매독을 앓다가 낳은 게 아니냐’고 물었다. 피해자 여복실 씨는 아이를 갖기 위해 애썼지만 의사는 ‘자궁이 굳었다’고 했다. 집을 나오며 남편에게 새 아내를 직접 얻어다 줬다. 피해자 김순덕 씨는 김학순 씨의 증언을 듣고 가족들에게 피해 사실을 털어놨다. 가족들에게 “괜히 귀찮고 자식들 충격받으니 신고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들었다. 위안소를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피해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질병과 고독, 가족들의 냉대였다.

지하 전시실 왼쪽 벽에는 어린 소녀들이, 오른쪽 벽에는 할머니들이 있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그들은 나이만 다른 한 사람이다. 할머니들은 어린 소녀, 과거의 자신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것 같다. 뒷벽에는 일본군 위안소 안 소녀들의 사진들이 교차되어 있다. 지금은 할머니라 불리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이 당시 어린 소녀들이었음을 떠올리게 한다.

전시실과 전시실을 잇는 계단 벽에는 할머니들의 사진과 말이 새겨져 있다. “원통해서 못 살겠다. 내 젊음을 돌려다오”, “그걸 다 기억하고 살았으면 아마 살지 못했을 거예요.” 복도를 따라가 나온 추모관에는 벽돌마다 돌아가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발언이 사진과 함께 걸려있다. ‘김달선(2015.06.11.)’과 같은 벽돌 사이사이에는 장미꽃이 놓여있었다. 2018년 살아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평균 나이는 90세가 넘는다. 추모관이 점점 더 빠르게 채워지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박물관 담벼락을 따라 맨 첫 전시관에 들어선다. 방은 조명도 없이 어둡다. 어두운 벽 위로 밝은 빛의 나비 떼가 눈에 띈다. 나비는 좁은 번데기에서 나와 밝은 세상 속을 날아오른다. 나비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을 상징한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역시 어두운 번데기 속을 나와 밝은 세상을 날게 되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글·사진_ 임하은 기자 hani1532@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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