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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나버린 시작, 회피하는 일본과 피해당사자 없는 ‘불가역적’ 합의일본군'위안부' 기획
임하은 기자  |  hani1532@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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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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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한일회담, 2015 위안부 합의를 두고 우리나라와 일본은 상반되는 주장을 해왔다. 기자는 하나의 합의에서 서로 다른 정반대의 주장이 나오는 이유가 의아했다. 그래서 해방 이후 위안부 합의의 역사를 따라가봤다. 
-편집자주-

   
▲ 나비 모양의 포스트잇에 방문자들의 응원문구가 적혀있다.
여성은 강제 매춘으로부터 보호받아야한다.

1907년 고종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조선의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파견하지만 이들은 일본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한다. 일본은 그곳에서 헤이그 조약의 부속서인 <지상전의 법규 관례에 관한 규칙>에 서명하고 있었다. 이 조약에는 여성이 전시 상황에 강간과 강제 매춘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규정이 담겨 있었다. 이후 일본은 <추한 업종에 종사시킬 목적으로 한 여성의 매매금지에 관한 국제조약>, <여성 및 아동의 매매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에 차례로 비준한다. 그러나 일본은 식민지의 여성에게는 위 조약을 적용시키지 않았다.

해방 직후, 어긋나버린 시작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을 선언한다. 연합국은 일본의 전쟁범죄를 단죄하기 위해서 극동국제군사재판을 열었다. 일본의 도조 히데키 전 수상을 포함한 천명 이상의 전범들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그 중 위안부 가해자는 12명뿐이었다. 

1951년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서 평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체결된다. 조약에 비준한 48개국은 일본군이 준 피해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포기하게 된다. 대신 자국 영토에 있는 일본의 해외 자산을 양도받거나 배상금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남한과 북한은 전쟁 중이라는 이유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은 대표성 논란으로 초대를 받지 못했다. 일본으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한국과 중국이 일본에게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보상금, 대신 청구권을 포기하라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따라 미군정은 우리나라 영토에 있는 일본의 자산을 양도받았다. 미군은 해당 자산을 다시 한국 정부에 양도했다. 양국간 재산상 채권 재무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1965년 제1차 한일 회담이 열렸다. 우리나라는 일본에 개인의 전쟁피해 배상권을 포함한 8개 항목의 청구권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했다. 오히려 일본 정부는 구체적인 징용 인원수와 증거 자료를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으로 인해 증거가 많이 소멸된 상태였고, 이북 지역에 대한 자료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양국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일본은 경제 협력의 형식을 갖춰 보상금을 제안했다. 대신 모든 청구권을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고 10년에 걸쳐 8억 달러를 받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 때문에 협정서에는 양국 간의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고 적히게 됐다.

드러나는 위안부 문제, 회피하는 일본

1991년 김학순 씨는 공개기자회견을 통해 일본군‘위안부’(이하 ‘위안부’) 피해자임을 증언하면서 위안부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났지만, 일본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김학순 외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에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 일본 사법부는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해 위자료 지급 판결을 내렸지만, 2003년 상급심에서 판결이 뒤집혀 결국 패소했다.

일본방위청 방위연구소 도서관에서 ‘일본군이 군위안소 설치에 관여했다’는 내용의 공문서가 발견됐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강제 연행에 대한 자료는 없다’며 다시 한번 책임을 회피했다. 이후 2차 정부조사결과에서 일본군과 정부가 ‘위안부’를 강제로 징집했음을 입증하는 자료들이 발견됐다.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증거였다. 
이에 일본의 내각관방장관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군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맡았으나, 그 경우에도 강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이 있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관여했다는 것이 명확하게 됐다” 이것이 고노 담화이다. ‘강제모집의 주체’를 민간업체로 내세웠고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정부는 피해자의 보상 문제가 1965년 청구권 협정으로 이미 끝났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일본 정부는 법적 책임인 배상금 대신 민간 기금에 의한 위로금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이것이 1995년 설립된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이하 아시아여성기금)이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성의와 노력을 인정한다는 성명과 아시아여성기금에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들은 “아시아여성기금의 본질은 책임 회피이며, 피해자들을 정당한 배상의 대상이 아닌 인도주의적 자선사업의 대상으로 보는 기금”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반대가 거세지자 한국 정부는 입장을 철회했다. 일본에 기금의 활동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베 정권을 포함한 역대 일본 정부는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의 담벼락에 피해 할머니들의 증언이 적혀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 세계가 주목하다

‘위안부’ 문제가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1996년 유엔 인권소위원회는 ‘위안부’ 제도는 명백한 인권침해임을 확인하고 일본에 국가 차원의 배상, 사죄, 처벌을 권고하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를 채택했다. 미국 하원은 2007년 만장일치로 일본 정부에 사죄를 요구하고 역사교과서 기록을 요구하는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했다. 하원에서 피해 사실을 증언한 이용수 씨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옥분(나문희 역)의 모델이다.

피해 당사자 없는 ‘최종적 및 불가역적 합의’

1965 한일 청구권 협약 제3조는 한일 양국 간 해석상의 문제가 생겼을 때 분쟁 조정 과정을 명시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청구권 소멸 여부가 논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조정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2011년 헌재는 외교부에 위헌 판결을 내렸다.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일본과 협상, 타결하여 최종적으로 종결을 선언했다. 이것이 ‘2015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이다. 아베의 일본정부는 ‘위안부 문제는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이며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했다. 또한 피해자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재단을 설립해 정부 예산에서 10억엔을 거출해 치유 사업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시아여성기금과 다를 바 없이 일본은 전쟁범죄의 법적 책임에서 벗어나있었다. 또한 한국 정부는 해당 합의를 통해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철거하도록 노력하며, 향후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비난·비판을 자제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본의 책임과는 거리가 먼 태도였다. 무엇보다도 한·일 양 정부는 피해 당사자와의 협의 없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했다.

이후 박근혜 정부는 ‘위안부’ 관련 정부 예산을 삭감했으며, ‘위안부’ 관련 정책 활동을 모두 중단했다. 위안부 합의를 재개하겠다던 문재인 정부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2018년 1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피해당사자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은 지난 합의는 진정한 문제 해결이 될 수 없으나, “2015년 합의가 양국간의 공식합의였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며 “재협상은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글·사진_ 임하은 기자 hani1532@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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