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를 관람하며 관객은 새삼스레 ‘본다’와 ‘이해한다’ 사이의 상당한 간극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직관적으로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 작품들을 마주하며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 간극은 나름대로의 ‘관찰’과 ‘해석’을 통해 메꿔질 수 있다.
현대미술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무하다면 작가가 가졌던 본래 의도를 이해하기보다 오해한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데에 한 가지 적확한 해석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미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 개개인의 감상도 작품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기자들이 흥미로움을 느꼈던 작품들을 위주로 짧은 단상을 덧붙여 봤다. 같은 작품을 보며 무엇을 느꼈는지, 여러분도 작품에 대한 자신만의 해설을 달아보길 바란다. -편집자주-

누가 날 좀 위로해줘요

 
관람 중 의기소침한 모습의 조각을 만났다. 조각은 무언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있다.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심각해 보이는 자세와는 달리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외관이 꽤나 귀여워 보인다. 자연스레 옆에 앉아 위로하듯, 한 번 쓰다듬어 보고 싶어진다. 한편, 조각은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강렬한 빨간색이다. 위로해 주고 싶지만 선뜻 그럴 수도 없는… 왠지 종강만을 고대하며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우리들의 모습 같지 않은가.

숨은 ‘자아’찾기

 
아무리 예술작품이라고 해도, 심통이 잔뜩 난 표정의 얼굴 수십 개를 동시에 보는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특히 그 얼굴들 위에 목이 잘린 몸통이 위치하고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림이 주는 그로테스크한 첫인상을 덤덤히 넘기고 나면 이 작품에 나름대로 측은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의 개성을 가장 잘 표현 할 수 있는 신체부위가 얼굴이라고 할 때, 작품에 나와 있는 얼굴들이 전부 엇비슷하다는 사실은 개성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단면을 해학적으로 나타낸다.
자신을 드러내 줄 얼굴을 찾지 못한 채, 수많은 ‘복제’ 얼굴들 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앉아 있는 몸통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전시장 안에서 발견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

 
‘괴짜들의 전시’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그림들을 발견했다. 행여나 그림 안에 어떤 ‘트릭’ 같은 것이라도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그저 일상의 평온함을 나타낸 그림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한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이유를 대기는 어렵지만, 이런 나른한 분위기의 그림이 왠지 마음에 와닿기 때문이다.
무어라 설명할 수는 없어도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그런 보장된 행복의 순간이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안온한 일상의 풍경들을 바라보는 것도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사르륵 녹아내리는 중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녹고 있다. 녹기 전 이 물체는 무엇이었을지 상상해 봐도 원래 모습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형태를 잃고 ‘흐물해져 가는 것’을 바라보며 ‘변화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녹아 사라져 버리는 것들이 비단 물질적인 것 뿐만은 아닐 것이다. 생각 역시 처음에는 단단한 형태로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가 어느 순간 들여다보면 녹아 없어져 있고는 한다. 새 학기를 시작하며 높은 학점을 받겠다던 다짐, 집에서 빈둥대는 시간을 줄여보겠다던 다짐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모르겠다. 감상은 반성으로 끝났다.

예술이 세상을 비추는 방식

 
작품들을 관람하던 중 옷걸이에 걸려 있는 지저분한 수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작가가 이 수건을 눈여겨보고 전시실에 걸어 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더라면 수건은 필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을 것이다. 어떻게 제 기능을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한 수건 하나가 ‘예술작품’이 될 수 있을까. 문득 어디선가 들었던 ‘예술의 역할은 소외되고 잊혀져가는 것들을 호명하는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우리가 무관심하게 대해왔던 사물 혹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이 수건은 예술작품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다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기

 
현대미술은 난해하다는 편견에 잘 부합하는 작품이다. 아리송한 작품 앞에서 한참을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좀처럼 작가의 의중을 파악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작품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로 생각의 방향을 바꿔봤다. 우리는 인생길을 걸으면서 종종 이 그림만큼은 아니더라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맞닥뜨리고는 한다. 그럴 때 한 번쯤 ‘세상은 원래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가득한 곳이다’라는 식으로 자신을 설득해보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이 그림은 우리에게 우회적으로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글_ 김세훈 수습기자 shkim7@uos.ac.kr
사진_ 최현웅 수습기자 hanse0707@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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