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은 광복 73주년, 정부수립 7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이다. 서울시립대신문에서는 70여년 간 발행된 우리나라 지폐에 얽힌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가 변화해 온 모습을 다루고자 한다.  - 편집자주

누군가 여러분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돈’이라는 대답이 분명 나올 것이다. 돈은 우리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존재이다. 돈은 거래에서 필요한 통용 수단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다. 역사 속에서 돈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석기시대에는 조개 껍데기가 돈의 역할을 했고, 전근대 시기에는 동전이나 철전 등의 금속 화폐가 돈의 역할을 했다. 근대 이후 사회에서는 종이돈, 즉 지폐가 돈의 역할을 했는데, 이러한 지폐는 통용되는 사회상을 잘 보여준다. 광복 73주년, 정부수립 7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지폐 발행의 역사를 통해 바라보겠다.

해방정국의 혼란상, 지폐에도 담기다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게 됐다. 해방 이후 사회의 많은 부분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지폐 발행을 맡았던 조선은행은 일본의 패망에 맞추어 지폐의 도안을 바꾸려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기술의 부족으로 종전에 사용하던 지폐(①)를 사용하게 됐다. 결국 해방 4년 후인 1949년이 돼서야 새로운 도안의 지폐(②)를 발행하게 됐다. 새 지폐에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상징하는 건축물 중 하나인 독립문이 등장했다. 세부적인 디자인에도 변화가 생겼다. 일본을 상징하는 오동나무 꽃이 있던 자리엔 우리나라의 국화인 무궁화가 등장했고, 조선은행의 상징 대신 태극문양이 들어가게 됐다.
하지만 곧이어 발발한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지폐 인쇄 시설을 차지한 뒤 지폐를 무분별하게 찍어내 남한 지역에 경제적인 타격을 주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승만 정부에서는 사용하고 있던 지폐(③)의 통용을 중지했고 일본에서 인쇄한 새 은행권을 사용하게 했다. 다만 유엔군의 반격으로 두 달만에 서울을 탈환하게 되면서 북한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부분이다.

▲ 일제강점기인 1930년 발행된 10원권 지폐
▲ 1949년 독립문으로 도안이 교체된 10원권 지폐
▲ 1950년 발행된 1천원권 지폐. 일본에서 제작됐다.

대통령 얼굴이 지폐에? 이승만 시리즈의 등장

그렇지만 전쟁이라는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국가의 경제정책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못했기에 통화의 가치는 크게 하락하게 됐다. 소위 ‘인플레이션’이라 부르는 이 현상은 당시 국가 경제에 매우 큰 타격을 가했다. 따라서 1953년 정부는 당시 쓰던 화폐단위 ‘원’을 ‘환’으로 바꾸고 그 교환비를 100:1로 하는 화폐개혁을 실시했다.
새롭게 등장한 ‘환’권의 디자인에는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이 등장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절대권력을 드러내는 당시 풍문 중 하나가 지폐 발행과 관련돼 있다. 당시 발행됐던 500환권 지폐에는 이 대통령의 사진이 중앙에 위치했다(④). 그런데 사람들이 지폐를 사용할 때 중간 부분을 접어 사용하다 보니 중앙의 초상화가 찢어지거나 닳게 됐다. 그래서 당시 아부 떨기 좋아했던 그의 하수인들은 초상을 왼쪽이나 오른쪽(⑤)으로 집어넣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 중앙에 초상이 인쇄된 500환권 지폐
▲ 오른쪽으로 초상이 이동한 100환권 지폐

4.19가 지폐 발행에 끼친 영향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이승만 대통령의 절대권력도 1960년대를 맞게 되면서 종언을 맞게 됐다. 3.15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은 이 대통령을 하와이로 망명케 했고,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됐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지폐 디자인에도 변화가 생겼다. 모든 지폐의 앞면에 있던 이승만의 초상을 삭제했고, 새로운 도안을 넣게 됐다. 새 정부는 새로운 도안에 어떤 인물을 넣을지 고려했고, 우리 민족의 스승이며 성군인 ‘세종대왕’을 넣기로 결정했다(⑥). 이것이 우리나라 지폐 중 가장 처음으로 세종대왕이 등장한 사례가 됐다. 당시 발행된 1000환과 500환권 지폐에 등장한 세종대왕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 많이 다른데, 이때까지 국가에서 정한 표준 영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편 100환권 지폐에는 국민들의 절약과 저축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일반인 모자(母子)가 함께 저축통장을 바라보는 디자인으로 바뀌게 됐다.
이 지폐에는 두 가지 특별한 기록이 존재한다. 먼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유명인이 아닌 일반인이 지폐에 들어간 사례로 남아있다. 게다가 25일만에 화폐개혁으로 인해 지폐 사용이 중지돼 우리나라 최단명 지폐가 됐다.

▲ 4.19혁명 이후 발행된 1천환권 지폐

부정부패를 뿌리뽑기 위한 화폐개혁, 실패로 돌아가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필두로 한 군부 세력들은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군사 정권을 세웠다. 그들은 사회 정화를 명목으로 깡패들을 소탕하는 등 시민들에게 자신들이 청렴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군사 정권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당시 만연했던 부정부패를 뿌리뽑으려 했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 자금을 마련하고자 했다. 따라서 지하 경제를 말소하고자 화폐개혁을 갑작스럽게 단행했다. 1962년 6월 10일, 군대를 동원해서 한국은행과 시중 은행을 봉쇄하고 당시 사용하던 환권을 ‘원’으로, 교환비는 10:1로 하는 화폐개혁을 시행했다. 갑작스럽게 시행된 화폐개혁은 도리어 독이 되어 중소기업이 도산하게 됐고 서민들의 생활고가 가중되어 경제에 매우 큰 타격을 줬다. 쿠데타를 묵인했던 미국에서조차 군사정권의 이런 무책임한 정책에 분개했다. 미국에서는 ‘앞으로 경제 정책을 시행하려면 미국의 허락을 받고 만일 이를 어길 시 원조를 끊어버리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이로 인해 군사정권은 목표했던 자금 확보도 거의 하지 못하게 됐다.
화폐개혁으로 새로 도입된 지폐(⑦)들은 대부분의 제작 공정을 영국에서 거쳤다. 화폐개혁을 위해 비밀스럽고도 신속하게 만들게 된 이 지폐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발견됐다. 지폐 하단부의 ‘한국조폐공사’라는 글씨를 오기해 ‘폐’가 아닌 ‘페’가 찍히는 등의 문제가 발생된 것이다.

▲ 영국에서 제작된 1차 50원권 지폐

원래 1만원권의 도안은 세종대왕이 아니었다? 1만원권 도안에 얽힌 비화

1970년대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자본의 유통량이 커지자, 정부에서는 고액권 지폐의 도입을 결정하기로 했다. 새로 5천원권과 1만원권 지폐를 동시에 발행하기로 했지만 1만원권 지폐는 5천원권 지폐보다 1년 늦게 나오게 됐다. 지폐 디자인 과정에서 불거진 종교적 문제 때문이었다.
원래 1만원권 지폐의 앞면에는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상이, 뒷면에는 경주의 불국사가 인쇄될 예정이었다. 모든 디자인을 마치고 박정희 대통령의 발행 허가까지 친필로 받아 발행하려던 찰나, 종교계 곳곳에서 이의를 제기했다. 불교계에서는 ‘신성한 불상과 사찰을 감히 지폐의 도안으로 사용할 수 있냐’며 발행 중지를 요청했고, 비불교계에서는 ‘특정 종교의 상징물을 지폐에 삽입하는 것은 다른 종교를 무시하는 처사’라며 발행 중지를 요청했다.
결국 부랴부랴 도안을 세종대왕으로 교체하게 됐지만(⑧), 지폐 용지 자체는 이미 인쇄를 마쳐놓았던 터라 지폐 속의 숨은그림(은화)은 석굴암의 조각이 들어가게 됐다.

▲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행된 1만원권 지폐

군사 정권의 정통성을 위해 이용된 이순신 장군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정권을 차지하게 된 박정희 정권은 언제나 그 정통성 문제에 시달려야 했고, 박정희 개인에게는 친일파라는 딱지까지 붙게 됐다. 따라서 정부 차원에서 ‘군인 출신 반일 영웅’을 찾게 됐고, 그렇게 찾아낸 사람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었다. 당시 정권은 이순신 장군의 기념사업을 국가적으로 진행했으며, 충무공의 사당인 ‘현충사’ 건물을 더 크게 짓고, 성역화했다.
1973년 발행된 5백원권의 뒷면에는 성역화를 마친 현충사가 도안으로 삽입돼 있다(⑨). 정작 기존의 현충사 건물은 한켠으로 밀린 채 박정희 대통령이 현판을 쓴 현충사 건물만이 도안에 등장한 것을 통해서 당시 정권의 의도가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우리 민족을 구원한 영웅 중의 영웅이지만, 군사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지폐 도안으로 사용됐다.

▲ 현충사가 들어간 500원권 지폐의 뒷면

신권의 등장과 5만원권 지폐의 빛과 그림자

2000년대 중반, 20여 년간 사용됐던 구권 지폐가 새로운 디자인의 신권 지폐로 대체됐다. 새로운 지폐로 교체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기술 발전으로 인해 컬러 프린터가 상용화되면서 위조지폐가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구권 지폐에는 위조를 방지하는 여러가지 기술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위조가 용이했다. 따라서 새 지폐에는 여러가지 위조 방지 기술을 사용하여 위조지폐를 쉽게 못 만들게 했다. 특히 1만원권 지페보다 위조 방지 기술이 적고 1천원권 지폐보다 이득을 취하기 쉬웠던 5천원권 지폐의 위조가 늘면서 5천원권 지폐를 제일 먼저 교체했다. 5천원 위조지폐의 악명 높은 위조 사례 중 하나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2억 5천만원 상당의 구권 지폐를 위조하여 부당 이득을 취한 어느 프로그래머의 사례가 있다.
2009년에는 36년 만에 새롭게 최고액권인 5만원권을 발행했는데(⑩), 남성 일변이었던 지폐 디자인에 여성인 ‘신사임당’을 지폐 도안으로 사용했다. 신사임당의 등장은 우리 사회가 양성평등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큰 도약을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다만 최고액권 등장으로 인해 불법 자금의 유통이 활성화됐다는 점은 아쉬운 점이다. 1만원권으로 채운 사과 박스를 주고 받는 대신 5만원권으로 채운 비타민 음료 박스로 뇌물을 수수한 전직 고위 정치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쓴웃음을 지은 바 있기 때문이다.

▲ 2009년 발행된 5만원권 지폐


한승찬 수습기자 hsc7030@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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