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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걷기’의 재발견 : 워킹 시뮬레이터
서지원 기자  |  sjw_101@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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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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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ar Esther의 게임 장면. 게이머는 주인공을 따라 스산한 때로는 신비로운 세계를 탐험하게 된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가끔씩 마음에 여유를 주고자 영화관을 찾아 잔잔한 영화 속의 세계로 잠시 여행을 떠나곤 한다. 영화는 영상과 음향을 활용해 비슷한 매체인 책보다 더 강한 몰입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영화를 통해서만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임의 장르 중 하나로 인정받기 시작한 워킹 시뮬레이터(Walking Simulator)를 플레이 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워킹 시뮬레이터는 걷다(Walk)와 특정 대상·현상을 모사하는 시뮬레이터(Simulator)의 합성어다.

사람들에게 훌륭한 간접경험을 제공하는 책이나 영화와는 달리 게임은 사람들에게 작품 속 장면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줘 보다 직접적인 경험을 선사한다. 게임의 이러한 특성은 회사·도시 경영, 트럭 운전, 농사까지 게이머에게 다양한 종류의 경험을 선사하는 시뮬레이터를 낳았다. 하지만 그러던 차에 워킹 시뮬레이터라는 명패를 단 게임이 만들어졌다. 이것 역시 다른 시뮬레이터처럼 걷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게임인 것일까?

사실 워킹 시뮬레이터라는 말은 원래 게임 진행이 과도하게 지루한 경우 '이 게임은 그냥 걸어다니는 것을 콘셉트로 했나보다'는 식으로 게임을 비꼬는 단어였다. 오랜 시간 동안 컴퓨터 게임에는 일반적인 스포츠와 같이 목표와 경쟁 등을 통한 자극이 필수적이라는 통념이 있었다. 하지만 지난 십몇년간 '게임도 하나의 작품으로서 차분하고 잔잔한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고 이는 작품이 던져주는 메시지를 더 명확히 전달할 수 있다'는 최소주의적 철학을 가진 게임 개발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게임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명확히 하고 이를 위해 필요하지 않은 자극·요소를 의도적으로 지워나갔다. 이는 당시 통념과 상반되는 과감한 실험이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게임들이 큰 호응을 얻기 시작하자 게이머들은 워킹 시뮬레이터라는 단어를 종종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게 됐다. 워킹 시뮬레이터를 어엿한 게임이라고 인정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게임 판매 플랫폼인 '스팀'에서는 유저들이 게임을 평가하기 위해 '태그'를 달 수 있는데, 여기서 유저들이 '최고의 워킹시뮬레이터'라며 좋은 평가를 내린 게임을 찾아볼 수 있다.

워킹 시뮬레이터, 걷기에 생명을 불어넣다

워킹 시뮬레이터의 시초 또는 대표격 작품이라 볼 수 있는 Dear Esther(2012)에서 게이머는 외길이 나 있는 무인도를 따라 묵묵히 걸어가게 된다. 게이머가 하나의 그림같은 게임 속 풍경을 둘러보며 길을 걸어가는 동안 귀에는 주인공의 독백이 들려오고 무언가 주인공에게 깊은 시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주인공은 어떤 사연 때문에 외딴 섬을 홀로 걷고 있는걸까. 제작자는 어떤 의도로 지금 보이는 풍경에 독백을 넣어놨을까. 가만히 멈춰 생각과 추리를 거듭해도, 게임은 게이머를 일절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파도와 바람소리를 잔잔하게 들려줄 뿐, 게이머는 걸어갈지 아니면 멈출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이렇듯 워킹 시뮬레이터는 기존의 화려하고 복잡했던 게임과는 달리 게이머가 현실 속의 삶보다도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사색을 잠길 시간을 준다.

게임으로서 갖춰야 하는 기본적인 것들만을 남긴, 보다 실험적인 작품들도 있다. 게임 Proteus(2013)에서 게이머는 파스텔톤으로 표현된 자연 속을 거닐게 된다. 그런데 화면 속의 나무와 달, 바다, 풀 모두 화질이 낮아 깨진 이미지를 보는 듯하다. 이는 점점 사실 같은 그래픽을 추구하는 요즘 게임의 기조와는 정반대이다. 또한 게이머에게는 아무런 목표가 주어지지 않고 자유롭게 걸어다니며 '저 언덕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방금 전에 해가 졌으니 반대쪽에서 뜨는 달을 볼 수 있을까' 등 나름의 호기심을 해결해나갈 수 있다. Proteus는 다른 게임들보다 가장 미디어 아트와 맞닿아있다. 미디어 아트는 컴퓨터 등 전자 기술의 발달과 함께 발생한 예술 사조로 컴퓨터 기술을 활용한 영상 또는 구조물 등의 작품을 포함한다. 이와 같은 예술품은 감상자에게 아무런 목표를 부여하지 않는다. 감상자는 그저 눈 앞에 펼쳐진 작품을 받아들이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넓혀나갈 뿐이다.

Dear Esther의 '게이머를 그저 걷게 하는 실험'이 성공한 이후로 세상에는 다양한 워킹 시뮬레이터가 생겨났다. 워킹 시뮬레이터는 대규모 인력이 필요한 주류 게임과는 달리 제작자가 전달하고 싶은 주제나 메시지만 있다면 비교적 쉽게 개발할 수 있다. 비슷한 이유로 일본에서 9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비주얼 노벨이나 2D RPG 게임은 아직까지 일반인들에 의해 제작되기도 한다. 이는 컴퓨터 활용 능력의 부족이나 자본력의 문제로 게임이라는 세계에서 자신만의 예술을 만들어 나가지 못했던 이들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실제로 현재 많은 워킹 시뮬레이터는 1인 개발자 또는 소규모 그룹에 의해 개발되고 있으며 작품마다 참신한 주제와 장면 묘사를 갖고 있다. 
 
워킹 시뮬레이터, 하나의 장르가 될 수 있을까?

워킹 시뮬레이터는 기본적으로 '(걸어다니면서) 주변을 느긋하게 감상하거나 감정에 집중할 수 있는 게임'이기 때문에 여러 장르의 게임들과 유연하게 결합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그 게임은 워킹 시뮬레이터라고 불리기보다는 다른 장르의 이름표를 달게 된다. 영국의 가디언지의 기사는 워킹 시뮬레이터가 하위 장르(sub genre)라고 말하며 독립적인 장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국 브루넬 대학의 로자 카보-마스카렐은 그의 논문 심미적 예술의 디지털화: 워킹 시뮬레이터(Walking Simulator: The Digitisation of an Aesthetic Practice, 2016)에서 "(워킹 시뮬레이터에서) 개발자는 게임 요소를 신중하게 배치하고 암시를 담아낸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는 해석의 여지가 풍부한 '자료'가 되고 게이머는 이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면서 워킹 시뮬레이터가 세간의 인식과 달리 '대충 만든 게임' 그 이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같은 논문은 "걷는 것은 탐험의 가장 중요한 요소다. 게임 속 화면은 어쩌면 위험하고 기이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와 안전한 집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화면 속 가상의 선들은 마치 낭만시를 써내는 펜선과 같다"며 게임이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과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서양 근현대 미술사에서 사실주의, 인상주의, 모더니즘 등 다양한 사조가 서로의 반동으로 생겨났듯, 워킹 시뮬레이터는 현대에 이르러 점점 더 복잡해지고 규모가 커지는 게임들에 '꼭 그렇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최소주의적 가치가 담겨 게임 속 불필요한 요소가 배제됐는지, 또는 걷는 것이 게임 플레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지와 같이 게임을 워킹 시뮬레이터로 분류하는 조건은 너무 애매모호하다. 따라서 이 장르가 게임계에서 하나의 합의된 장르가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워킹 시뮬레이터는 게이머의 '게임 경험'을 다양화하고 기존의 게임과 예술간의 간극을 메꿔 사람들을 새로운 세상으로 초대하는 새로운 방식임은 분명하다. 최근에 상용화되고 있는 VR 기술이 워킹 시뮬레이터를 만나 서로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길 기대해본다.


서지원 기자 sjw_101@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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