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건축가 김중업(1922~1988) 타계 30주기를 맞아 ‘김중업 다이얼로그 전’을 오는 12월 16일까지 연다. 서울시립대신문에서는 한국 현대건축의 대표적인 건축가인 김중업의 삶과 주요 작품을 통해 그의 건축에 대한 생각과 열정을 다루고자 한다.  -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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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현대건축의 대가 중 하나인 김중업(1922~1988)
건축가 김중업이 탄생하기까지

김중업은 1922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고위 공무원으로 평안도 여러 곳의 군수를 지낸 바 있다. 그는 유복한 가정환경 속 평양에서 제일가는 명문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린 시절 그는 문학과 미술에 심취한 감수성이 높은 아이였다. 그런 김중업을 지켜보던 그의 부모는 그가 ‘배고픈’ 화가나 문학가가 돼 힘든 삶을 살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문학과 미술과 같은 예술의 한 갈래임과 동시에 실용기술인 건축을 배울 것을 권유했다. 김중업은 이를 받아들여 일본의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에 입학하여 건축을 배웠다. 그는 이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건축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히고 해방 후 서울에서 건축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건축학을 가르치게 됐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부산으로 피난을 온 후 그에게 매우 중요한 기회가 찾아왔는데,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국제 예술가 회의’가 개최된다는 것이었다. 유네스코에서 개최한 이 회의는 우리나라의 예술가들에게도 초청장이 전해졌고, 김중업은 그 중 한 명이었다. 베니스에 도착한 그는 당대 최고의 건축가이자 현대 건축에 큰 영향을 끼친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를 만날 수 있었다. 김중업은 그에게 달려가 다짜고짜 그의 밑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동양의 머나먼 나라에서 온 김중업을 본 르 코르뷔지에는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었지만 이미 많은 이방인 조수들을 밑에 둔 그는 파리에 위치한 자신의 아틀리에(작업실)로 와 보라는 대답을 남긴 채 베니스를 떠났다.

르 코르뷔지에에게 건축을 배우다

고국에 자신이 부양해야 할 대가족을 남긴 채, 베니스로 온 그였기에 그는 고뇌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건축의 대가인 르 코르뷔지에의 밑에서 건축을 익혀 고국으로 돌아간다면, 그에게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동료 예술인을 등 뒤로 한 채 파리로 떠났다.

파리의 르 코르뷔지에의 작업실에 찾아간 김중업은 르 코르뷔지에에게 실력을 검증받을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르 코르뷔지에는 김중업에게 당시 그가 맡고 있었던 인도의 계획도시 찬디가르(Chandigarh)의 행정청사 옥상정원의 설계를 맡겼고, 김중업은 태극을 모티프로 한 동양미를 살린 설계를 했다. 김중업의 설계를 본 르 코르뷔지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김중업을 그의 조수이자 제자로 받아들였다. 김중업은 르 코르뷔지에의 아래에서 찬디가르에 여러 건축물에 대한 실무를 맡았다. 그는 3년 동안 르 코르뷔지에의 아래에서 일한 후 귀국했다.

3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김중업은 르 코르뷔지에가 제시했던 현대건축의 여러 조형적인 요소를 몸으로 체득했다. 이를테면 이전의 건축기법에서는 구현해낼 수 없었던 건축물의 하중을 기둥과 보로만 지탱하게 해 벽을 ‘해방’시킨 후 자유로운 입면을 구상하는 것 등이 있다.

▲ 김중업이 1956년 설계한 부산대학교 구 본관. 르 코르뷔지에의 조형 기법을 많은 부분 차용했다.
▲ 서강대학교 본관 전경. 도드라진 입면이 인상적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고국으로 돌아온 김중업은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됐다. 르 코르뷔지에라는 현대건축의 대가로부터 직접 수학한 그의 경력은 곳곳에서 건축설계를 맡아달라는 주문이 쇄도하게 된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됐다. 그가 귀국한 직후에 설계한 작품 중 주요작들은 부산대학교 본관(1956), 건국대학교 도서관(1956), 서강대학교 본관(1957) 등이 있다. 이 세 작품들의 공통점은 르 코르뷔지에가 사용했던 건축기법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부산대학교 본관의 경우, 가로로 긴 창과 필로티(Pilotis) 등이 르 코르뷔지에가 그의 설계에서 사용했던 그것과 같은 형식을 가지고 있다. 특히 후면 입면의 경우 크고 작은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불규칙한 창은 당시 르 코르뷔지에가 세상에 내놓았던 롱샹 성당의 입면에서 차용했다.

한편 서강대학교 본관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파격적인 파사드(건축물의 정면)이다. 벽에서부터 돌출시킨 격자 모양의 ‘브리즈 솔레이유(건물 전면에 부착된 태양 차단물)’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그림자가 다르게 지도록 설계됐다. 김중업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그림자로 언제나 변화하는 건물의 모습을 의도하여 비정형적인 건축을 구현하고자 했다. 또한 르 코르뷔지에가 창시한 모듈러(건축에 필요한 수치와 비례를 규격화한 체계) 이론에 입각해 구조물을 설계했다.

이렇듯 김중업의 초기 설계작들은 당시 세계의 보편적인 건축 사조인 르 코르뷔지에의 현대건축을 본받아 설계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다르게 말하면, 르 코르뷔지에를 모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이다’라는 격언이 있듯이, 김중업은 곧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설계를 내놓게 된다.

▲ 한국 현대건축의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주한프랑스대사관. 하지만 현재는 건립 초기에 비해 구조가 변형됐다.
주한프랑스대사관, 현대적 시각으로 전통을 재해석하다

1959년의 어느 날, 김중업은 주한프랑스대사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대사는 김중업에게 한국의 프랑스대사관을 설계해줄 것을 부탁한다. 김중업이 프랑스에서 르 코르뷔지에의 밑에서 일했던 것이 인연이 됐던 것이다. 김중업은 바쁜 와중에 대사관의 설계를 착실히 진행했고, 1960년 가을에 공사를 시작해 62년에 완공했다.

서대문 인근, 인왕산과 남산을 잇는 자락에 자리를 잡은 주한프랑스대사관을 본 사람들은 건물의 모습에 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 현대건축 사상 이토록 전통의 아름다움을 현대건축의 기법으로 잘 구현해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건물의 지붕에 깃털처럼 살포시 앉은 지붕은 우리나라 전통 기와지붕의 고유한 곡선미를 매우 잘 살려냈다. 건물의 열주(일렬로 늘어선 기둥) 또한 날렵하면서도 중후한 지붕을 아름답게 떠받치고 있다. 건축가 정기용은 “이 건물은 보면 볼수록 싫증나지 않고 오히려 그 심원함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하는데 이는 한국 현대건축사에서 유일하다”라는 말로 이 건물의 예술성을 극찬했다.

주한프랑스대사관은 현대 한국건축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건축물이다. 김중업은 전통을 단절된 것이 아닌 과거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흐르는 물줄기로 생각했다. 즉, 전통과 현대를 나눌 수 없는 관계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김중업의 관점은 후대 건축가들이 전통을 ‘박제’의 대상이 아닌 ‘재해석’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건축관에 영향을 미쳤다.

▲ 서울 중구 광희동에 위치한 서산부인과의원 건물. 독특한 조형미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도시계획은 잘못됐다!

1960년대부터 급격히 진행된 우리나라의 산업화는 서울의 대도시화를 촉진시켰다. 빠른 속도로 인구가 늘어나게 된 서울은 이를 감당하기 위해 빠르게 주택을 건설하고, 상·하수도 등의 기반시설을 구축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도시계획은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다. 김중업 또한 ‘사람’이 없는 당국의 도시계획을 비판했다. 그는 허황되고 그럴싸한 도시계획이 아닌, 진정 사람을 위하고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 도시계획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러던 중, 정부와 서울시의 무계획적인 도시빈민 이주계획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광주대단지사건’과, 부실공사로 점철된 끝에 결국 붕괴돼 많은 사상자를 낸 ‘와우아파트 붕괴사고’가 발생하자, 김중업의 비판의 칼날은 더욱 더 날카로워졌다. 결국 그는 정권의 미움을 사 프랑스로 추방당했다. 그는 당시 수행했던 프로젝트의 대가도 지급받지 못했고, 가족들을 남긴 채 홀로 떠났다. 다행히 주한프랑스대사관 설계로 인해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생활하며 건축을 가르쳤다. 그는 유신정권 말기인 1978년에서야 고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에 위치한 올림픽 평화의 문. 공무원들의 어설픈 개입으로 김중업의 제작 의도가 퇴색됐다.
시를 세운 건축가 김중업, 그가 세상에 남긴 것은

수년간의 타국 생활은 그가 가지고 있던 당뇨병과 고혈압을 악화시켰다.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다만 이 시기 김중업의 설계작품들은 김중업 특유의 조형미가 담겨 있지는 않는데, 건강악화로 인해 프로젝트 전체를 총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동료, 후배 건축가들에게 기본 설계를 맡기고 자신은 부분마다 설계에 관여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 그가 설계했던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올림픽 평화의 문(1986)이다. 1988 서울 올림픽을 기념해 조성된 올림픽공원의 조형물로 설계된 평화의 문은 불꽃이 마지막에 강렬하게 타오르는 것처럼 김중업의 마지막 열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수차례 설계안을 바꿔가면서까지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혀 그의 원래 안은 수정돼 지어졌다. 평화의 문이 지어지고 올림픽이 개최된 해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김중업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작품은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그의 건축에 대한 본원적인 사유는 작품의 예술적인 완성도에 깊이를 더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이제 30년이 지났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현재성을 지닌 채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한승찬 수습기자 hsc7030@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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