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부문 우수작>

 
나는 태어나길 용이었다. 용 띠로 태어났다. 하찮은 곰이나 독수리 따위와는 급이 달랐다. 나는 용이 마스코트인 야구팀을 응원했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오늘따라 유니폼 바지가 더 작고 짧게 느껴졌다. 용으로 태어났지만 독수리의 유니폼을 입을 수밖에 없는 나는 등에 맥주 통을 짊어졌다. 용이 되지 못한 독수리라니. 관중석을 누비는 한 마리의 독수리가 된 내게 25kg의 맥주 통은 너무나도 무거운 것이었다. 그러니까 용이었으면 좀 좋아?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쉰다. 내가 하는 일은 야구장의 관중석을 쏘다니며 열심히 응원하다 지친 관중들에게 맥주를 따르는 일이었다. 내 주특기는 한 손만 사용하는 다른 맥주보이들과는 다르게 양 손으로 관중들의 컵에 맥주를 따르는 것이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독수리 같다고 해서 나는 관중들에게 ‘맥주독수리’로 불렸다. 심지어 ‘맥주독수리’가 따르는 맥주가 아니면 먹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손님까지 생길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여의주를 찾기 전까진 독수리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내가 맥주 한 잔을 따라주고 받는 돈은 여의주를 사기에는 턱 없이 비쌌다. 난 그래서, 용이 되지 못한 독수리였다.

나는 고시원 원룸에 혼자 살았다. 어쩌면 독수리에게는 과분한 공간. 집의 가로 폭은 독수리의 날개를 접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내가 사는 원룸은, 여름이면 눅눅했고, 겨울이면 외풍이 불어 뼈가 시리도록 추웠다. 책상 하나와 옷걸이가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의 좁은 방 안 책상 다리 밑으로 내 다리를 뻗고 누워있으면, 조금만 잘못 움직였다간 압사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다. 조그만 지진이라도 일어나면 저 물건들은 사정없이 나를 덮칠 것이고 그 길로 나는 끝이다. 악몽도 매번 꿨다. 영화 「페르마의 밀실」처럼, 내가 누워있는 작은 방의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꿈이었다. 책상이 벽과 벽 사이의 압력에 의해서 천천히 부서졌고, 문이 뭉개져서 나갈 통로가 없어졌다. 그리고 나선 책상이 내 눈 앞까지 다가왔고, 벽이 집 안에 있는 몇 가지 물건들과 마찰하며 나는 소리가 들렸다.

방의 크기는 더 줄어 나중에는 팔 다리를 펼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점점 내 몸을 접던 나는 결국 무릎 사이에 머리를 처박은 채로 공포에 떨었고 그럼에도 방의 크기는 점점 줄었다. 거기까지였다.

나는 항상 최악에 치닫기 전에 잠에서 깼다. 어쩌면 꿈에서 마저도 도망친 것일지도 몰랐다. 어릴 적 꿨던 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꿈에서 나는 이미 한 마리의 용이 되어 있었는데, 무엇인지 모를(나는 내 어깨 위로 산이 하나 올라온 것 같다고 느꼈다)것이 나를 덮쳤고, 나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절벽에서 떨어졌다. 집을 나온 이후로 계속해서 꾸고 있는 꿈이었다. 나는 집을 도망쳐 나왔다. 그리곤 관중석을 내 집으로 삼았다. 그거 알아요? 많이 웃는 사람일수록 더 슬픈 사람이래요. 맥주를 파는 것은 곧 웃음을 파는 것과 같았다. 사람들이 많은 자리를 먼저 선점하는 것과 수요가 많은 좌석을 찾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지만, 시끄러운 경기소리와 응원가의 소음을 제치고 말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잡는 것 또한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매번 맥주를 팔 때마다 독수리가 마스코트인 팀의 팬이 되었다. 직장 상사와 함께 온 신입사원이 있는 좌석에서는 상사와 자연스럽게 응원가를 부르며 분위기를 풀었다. 호응 유도에 성공하면 매출은 자동으로 따라왔다. 신입사원은 곧 잠시 자리를 비웠고, 나를 찾아와 맥주를 사갔다. 응원하는 팀이 이기고 있는 경우에는 더 일이 쉽게 풀렸다. 홈경기에서 홈런이라도 치는 날에는 4회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할당량을 다 팔기도 했다. 일찍 맥주를 다 판 날에는 맥주 통을 내려놓고 관중들 사이에서 야구를 구경하기도 했다. 1루에서 2루로 전력 질주하는 1번 타자처럼, 관중석을 쏘다니면서도 나는 경기를 계속 지켜봤다. 야구 경기를 거의 매일 볼 수 있다는 것이, 내가 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유였다.

내가 집을 나온 건 딱 19살이 되고 난 이후였다. 정확히 말하면 18살과 19살의 고비에 선 시간대였다. 11시 59분. 내가 집을 나온 건,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사실 꿈에서 계속해서 좁아지던 집처럼, 내 공간은 계속해서 작아지고 있었다. 아빠는 소위 ‘드렁큰타이거’였다. 부었고, 마셨고, 때렸고, 잤다. 안방극장에서나 나올 법한 내용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나는 믿고 싶지 않았다. 쾌쾌하고 쉰 냄새와 더불어 방 안에서는 늘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깨지는 소리가 나면 깨지는 게 있고 맞는 사람이 있으면 때리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술만 먹으면 아빠는 난동을 부렸다. 마치 호랑이가 마스코트인 야구팀의 한 선수처럼. 야구팀에서 ‘맹수’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 선수는 시합이 끝난 후 숙소로 돌아가기 전 꼭 맥주 한 잔을 사들고 가는 것으로 유명했다. 타격왕까지 할 정도로 실력 있는 선수였으므로 SNS에는 ‘맹수‘가 사람들과 찍은 사진이 가득했는데, 배트를 잡고 있는 사진 외에 거의 모든 사진에서 맥주를 찾아볼 수 있었다. ‘맹수‘는 결국 은퇴 직전인 자신의 말년에 ’음주운전 중 뺑소니‘ 혐의로 입건된 후 불명예 은퇴를 했다. ‘맹수‘라고 불리던 선수가 맥주를 마신 것처럼 아빠는 깡으로 소주를 마셨고, 다 마신 병들은 항상 방 안을 굴러다녔다.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술로 채워가던 아빠에게 총량의 법칙 따위는 없었다. 어느 정도 몸에 술이 채워지기 전까지 아빠는 묵묵히 술을 마셨다. 그렇게 천천히 몸에 알코올을 축적하던 아빠는 자신의 주량이던 두 병반을 넘긴 후로는 폭군으로 변했다. 한 병을 비우자마자 바로 자신의 앞에 다른 게 놓여있지 않으면 먹은 술병을 집어던졌다. 술병이 다 깨지고 나서도 술이 없으면 엄마와 나를 때렸다. 술 마시던 호랑이의 코털을 건드린 두 명의 사람은 방의 구석으로 계속해서 몰렸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나와 엄마가 찜질방으로 나가고 나서야 겨우 집 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물론 집 안에 여기저기 흩어진 유리조각들과 구토는 엄마의 차지였다. 방 한가운데에서 퍼져 자고 있는 아빠를 피해 집을 치울 때마다 엄마도 자신의 방이 작아지는 것처럼 느꼈다고 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내 인생은 제로게임이었다. 어디선가 기쁨이 생기면, 반드시 다른 곳에서는 슬픔이 따라왔다. 나쁜 일은 주로 몰아서 온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은 우리 가족을 위해 만들어 진 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아빠가 처음부터 그런 술고래는 아니었다. 원래 아빠는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게 오히려 더 정확하다. 야간에 쓰레기를 처리하는 청소부였던 아빠는 늘 야구의 대주자와 같았다. 1루에서 2루로, 2루에서 3루로 도루하는 주자들은 늘 투수의 시야 바깥에서 활동해야 했다. 아빠의 활동 시간은 주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2시부터 6시 사이의 시간이었다. 내가 학교를 갈 때면 아빠는 집에 들어와서 잠을 자고 있었고, 집에 들어올 때면 뭔가 준비한다며 형광색으로 칠해진 작업조끼를 입고 밖에 나갔다. 아빠의 작업조끼에선 항상 갖가지 음식물이 썩는 냄새가 났다. 그래서 아빠는 전력질주를 하면서도 베이스를 지나치지 않기 위해서 슬라이딩을 하는 대주자처럼, 집으로 들어오기 전에 목욕탕을 들렀다 왔다. 집에 들어올 때면 아빠 근처에서 비누냄새와 음식물 썩는 냄새가 함께 났는데, 정말로 적응하기 힘든 냄새임은 틀림없었다. 어쨌거나 시야에서 멀어지면 자연스럽게 사이도 멀어진다고들 하는데, 어느 한 쪽이 잘못된 건지 아니면 그 격언이 잘못된 건지 우리 가족은 그럭저럭 잘 지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잠시 생각했다. 시야에서 멀어질수록 더 애틋해지는 게 아닐까, 하고.
-심할 경우에는 다리 한쪽을 절단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불행은 늘 여러 겹으로 겹쳐 온다. 그리고 그 세기는 자신이 살아온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2군에서 한 번도 올라오지 못하던 선수가 1군 첫 등판경기에서 슬라이딩 캐치를 하다가 갈비뼈가 부러지고, 그것이 치명적인 부상으로 연결되어 처음이자 마지막 1군 생활을 뒤로하고 선수생활을 접기도 한다. 아빠는, 정확히는 형광 작업조끼를 입고 쓰레기를 수거해서 트럭 안으로 던져 넣던 아빠는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오토바이를 피하지 못했다. 비교적 이른 시간에 음식을 배달하고 나오던 오토바이는 코너를 돌다가 바로 앞에 있는 아빠를 보지 못했고, 마치 홈스틸을 시도하는 주자처럼, 들이받았다. 오토바이에 치인 아빠는 트럭 바퀴에 다리가 깔렸다. 그리곤, 병원으로 실려 왔다. 형광 작업 조끼를 입은 채로 누워 있는 아빠는 한참 동안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그것에서 깨어날 즈음 다시 큰 잠에 빠지게 됐다. 평생을 부지런하게 열심히만 살아온 아빠는 마치 번아웃이 된 사람처럼 그 이후로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마치 독수리의 날개가 부러져 날지 못하게 되자 사나워지는 것처럼 조울증 같은 불안한 증상이 나타나 처음엔 아빠 자신을 괴롭혔고 다음은 가족에게 화살이 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술이 미치도록 싫었다. 음식점에는 늘 사람이 많았고, 특히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에는 앉아서 진창 술을 마시는 손님도 적지 않았다. 노래방도, 피시방도 술을 마신 손님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들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내 관심사는 오직 야구 뿐 이었다. 야구를 하지 않는 비시즌에는 시즌 하이라이트를 몇 번이고 돌려봤다. 그러다 문득 집에서 혼자 응원가를 부르고 있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야구장에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기 시작했다. 야구장에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많았다. 식품코너에서 음식을 포장하고 주문을 받을 수도 있었고 경기장 입구에서 관중들의 표를 확인할 수도 있었다. 그라운드를 청소할 수도 있었고, 안전요원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식품코너 아르바이트는 경기 시간동안 늘 붐비는 사람 때문에 경기를 볼 틈이 없었고, 표를 확인하는 아르바이트는 경기장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그라운드를 청소하는 것은 우천상황이 아니면 주로 경기 전과 후로 나눠졌기 때문에 선수와 경기를 볼 수 없었다. 안전요원도 마찬가지였다. 안전요원의 일은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지 경기를 관찰하는 것이 아니었다.

난 맥주를 팔았다. 술이 미치도록 싫었지만, 맥주를 파는 것이 가장 경기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방법이었고, 팬들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야구장에서도, 내 인생은 제로게임이었다. 술을 팔면서 나는 수많은 아빠를 보았다. 야구에는 늘 홈 팀과 원정 팀이 있었다. 문제는 원정 팀이 내가 응원하는 팀일 경우 일어났다. 나는 집에 간직해둔 몇 벌의 유니폼을 두고도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어야 했다. 홈 팀은 비록 지고 있었지만 가족 단위로 온 손님들이 많아서 훈훈한 분위기였다. 8회 말, 투 아웃 만루 상황에서 상대 팀은 대타를 기용했다. 최근 연이은 하락세로 팬들의 원성을 사는 선수였다. 나는 안심하고 맥주를 팔기 위해서 이리저리 관중석을 둘러보고 있었다. 스트라이크 원, 스트라이크 투. 우리 팀 투수의 공이 미트에 묵직하게 꽂혀서 퍽, 하는 소리가 관중석까지 들릴 정도였다. 홈 팀의 분위기는 고조되었고, 오직 나만은, 매우 편안한 모습으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 관중이 급한 표정으로 나를 부르곤 맥주를 샀다. 나는 얼른 양복을 입은 관중 앞으로 달려갔고, 컵을 쥐어주곤 맥주를 따랐다. 양 손으로 맥주를 따르는 묘기를 부리던 그 순간, 깡, 하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맥주를 따르다 말고 고개를 쳐들었다. 마운드 위의 투수는 직감이라도 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포수는 마스크를 집어던지고 먼 산을 바라봤다. 침묵하던 관중들도 마치 눈치게임을 하듯 순식간에 일어났다. 공은 멈추지 않고 쭉쭉 뻗었고, 처음에 타구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뒤로 뜀박질을 하던 외야수들은 걸음을 멈췄다. 공의 종착지는 그라운드 바깥이었다. 경기의 판도를 뒤집는 역전 홈런이었다. 나는 맥주 따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맥주는 그대로 컵에서 넘쳐흘러 남자의 바지에 흘렀고, 그 상황에서 웃지 못하는 것은 나와 그 남자, 둘이었다. 하루 치 일당을 승리와 함께 날린 나는 결국 제로의 상태가 되었다.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야구장을 나오는 길, 엄마로부터 문자가 왔다. ‘밥은 먹었니.’ 로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엄마와 나는 얼마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 엄마의 그저 착하기만 한 삶을 외면하고 싶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인 경우가 살다보면 허다하다. 어쩌다 나를 찾는 사람의 경우는 돈이 필요하거나 내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 휴대폰의 용도는 그저 야구를 보는 것 밖에 없었다. 나는 알바를 나가지 않는 날에는 휴대폰으로 야구를 꼭 챙겨봤다. 나에게 연락을 하는 사람은, 알바를 대신 뛰어줄 소위 ‘땜빵’이 필요하거나, 원룸 방세를 내라고 독촉하는 집 주인 밖엔 없었다. 그리고 나에게 문자가 왔다. 밥은 먹었냐. 어떻게 지내고 있냐. 카페에서 한 번 보자. 그 문자의 끝에는 주말에 한 번 보자는 말이 적혀 있었다. 나를 키워준 엄마였지만, 연락도 하지 않고 지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몇 없는 나의 경우의 수에 엄마를 대입했다. 그리곤 깨달았다. 돈이 필요하구나. 어쩌다 가족이 사람을 분류하는 흔한 몇 가지 기준에 의해 정리 되어버린 것인지 생각할 시간이 나에겐 없었다. 사실 그런 생각을 하고 살 만큼 내 방은 크지 않았고, 여유롭지 않았다. 나는 딱 잘라 말했다. 나름 잘 지내고 있고, 별로 보고 싶지 않네요. 가족의 문자를 되받아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딱 5초였다. 나는 ‘맥주 기계에서 한 컵 분량의 술이 자동으로 따라져 나오는 시간. 그만큼의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라고 정의했다.

카페에서 이뤄진 나의 대화는 아주 단순했다. 마치 벤치 클리어링에 참여하는 선수들의 마음가짐처럼. 잘 지내니, 라는 단순한 말을 나는 침묵으로 되받았고, 선수들은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그라운드로 뛰쳐나갔다. 연락을 기다렸다는 말에는 바빴다는 것으로 대신했고, 싸움에 동참하지 않는 외곽의 선수들은 ‘시합 끝나고 김치찌개 콜?’ 같은 농담을 건넸다. 먹어본 것은 편의점 음료수와 관중이 건네는 맥주밖에 없었던 나는 카페에 내걸린 메뉴판을 보았지만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그건 마치 선수들은 구장 안에서 이온 음료나 물 정도만 마실 수 있는 것과 같았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한 선수는 벤치 클리어링때 화난 상대팀 선수로부터 이온 음료세례를 맞았다고 했다. 내가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것은 단지 음료수의 종류뿐만이 아니었다. 다리에 생긴 염증, 재수술과 그 수술비, 아들과 아빠라는 끊을 수 없는 인륜까지. 그런 아빠를 떠나지 못하는 엄마는 다음 시합에 선발로 나서는 선발투수를 다치지 않게 하려고 뛰어나가는 선수를 온몸으로 막는 코치였다. 어쩌면 부부는 결혼식 때 하는 서약서처럼 기쁘거나 슬프거나 검은 머리가 흰머리 되도록 책임을 다해야 하는, 둘이 짝지어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라는. 각각 한쪽 다리를 묶고 달리기를 해야 하는 게임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저 나는 가족이지만 관객이었다. 그러나 다가서서 넘어진 그들을 일으켜 주고 싶지만 그들만의 게임에 개입하는 건, 월권이라 생각했다. 엄마가 늘 내게 하던 말처럼. 넌 네 인생을 살아라. 난 내 인생을 살아야만 했다. 같이 무너져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엄마가 오늘 나를 찾아온 이유는 그저 엄마의 역할을 다하기 위함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딩동. 형광판에 내 순서가 찍힌 번호가 울렸다. 그 소리는 내 고민을 떨쳐내려는 듯, 너무도 짧고 경쾌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원무과 여직원은 다급히 일어서서 471번 손님 안 계신가요? 한 번 물은 후 다시 자리에 앉아 472번을 눌렀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움직이는 그 직원의 눈매는 마치 다음 술병을 찾던 아빠의 것과 닮았다. 나는, 창구 앞으로 걸음을 뗄 수 없었다. 다시 은행 의자에 주저앉은 나는 잠시 후 뒤돌아 은행을 나왔다. 어쩌면 나는 어머니의 문자에 대답했을 때처럼, 내 통장과 아빠의 값어치를 따지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결국 모든 것은 ‘제로’가 된다. 아버지를 돕는다면 난 다시 축축하고 어두운 고시원으로 돌아가야 했고, 맥주독수리 행세를 하며 맥주를 팔아야했다. 돕지 않는다면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되는 것이었다. 어쩌면 살인자가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문을 밀자 뜨거운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살 사람은 그래도 살아야지. 나는 아버지를 닮았다. 이기적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나를 원망할 수 없다.

몇 번의 전화가 계속해서 울렸다. 고시원 원룸에서 잠을 자고 있던 나는 머리맡에 있는 책상위로 손을 뻗었다. 새벽 5시. 휴대폰을 켜자 환한 빛이 얼굴로 쏟아졌다. 눈이 따가웠다. 야구뉴스 알림이 떠 있었다. 독수리군단이 비룡군단에 8회말 투아웃에 그랜드슬램 쾅, 비룡군단 충격의 역전패. 화면에 뜬 발신자와 뉴스 기사를 번갈아 바라본 나는 휴대폰을 현관문 쪽으로 집어던졌다. 충전기가 연결되어 있던 휴대폰이 툭,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다시 잠에 들 때까지, 휴대폰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그 시각, 잠에 빠진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병원 영안실 앞에 서있다. 아버지를 애통해하며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이제 아버지로부터 진정한 해방인데 어째서? 자신의 지나온 세월이 한스러워 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세상으로 간 아버지가 불쌍해 우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참고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너무나 애통해서 우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몇 안 되는 조문객들은 그런 어머니를 위로하고 있었다. 좋은 곳으로 가실 거라고. 고통 없이 가셨을 거라고. 이제 걱정하지 말고 본인 몸 잘 추스리라고. 어쩌면 장례식 조문객들이 할 수 있는 말은 가장 가볍고도 가장 쓸모없는 말들이다. 마치 직구를 던져 홈런을 맞은 투수에게 다음엔 직구 말고 변화구로 승부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한 경기 내내 삼진을 당한 선수에게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말하는 것처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예상대로, 아버지를 찾아오는 조문객은 얼마 되지 않았다. 술주정뱅이 곁을 끝까지 지켜줄 동료나 친척 따위가 있을 수가 없다. 인간관계란 것이 일방적일 수 없다. 하나를 받으면 둘을 줘야 하는 노력도 역시, 술주정뱅이에게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그렇게 된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잃었고, 돈을 지켰으며, 아버지는 아들을 잃고 나름의 용서를 얻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잃었지만, 폭력과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났다. 그런데 나는 왜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 내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나에게 분노와 원망의 대상이 없어졌다는 것은 나의 삶의 원동력이 없어졌다는 말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얼마가지 않아 깨달았다. 결국 나는 다시 제로였다. 마이너스도, 플러스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 시작을 하지 않은 것도, 끝이 난 것도 아닌 상태.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자 미친 듯이 살았고 아버지와 같은 술주정뱅이들을 경멸하면서도 맥주를 팔았다. 돈을 모아 비좁아 다리도 뻗기 힘든 고시원 원룸을 벗어나고자 했고 결국 나는 성공했다. 반쪽짜리 성공이었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모은 돈이었다. 돈과 아버지의 목숨과 바꿨다는 얘기를 누군가 알게 된다면 ‘그깟 돈’ 이라며 혀를 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마치 그것은 병살타를 치고도 1점을 얻었다며 좋아하는 꼴이 될 테니까. 드라마에서 자신의 형을 죽인 범인에게 복수하려는 동생에게 경찰관이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장담컨대, 범인을 죽여도 네 기분은 나아지지 않아. 내가 해봤거든. 복수는 상황을 원점으로 만들 수 없었다.
야구에는 동점과 블론세이브가 존재할망정, 제로게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투수가 상대팀에게 한 점이라도 주는 순간 그것은 평균자책점이라는 양수로 기록된다. 타자 또한, 아무리 타격을 못해도 한 번의 행운의 안타가 있다면 그 수치는 0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야구를 좋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쌓아온 모든 것들을 제로로 만들어버리는 것은 야구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떠났고 나는 고시원을 나왔다. 내 선택을 누군가는 너무나도 참담한 결과라고 평가할 지도 몰랐다. 그래도 햇살이 조금은 들어오는 반 지하방으로 짐을 옮기는 날. 나는 이삿짐 트럭에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창문 밖을 보고 있는데 이삿짐 차가 멈춰 섰다. 쓰레기차가 서 있고 청소부 두 명이 부지런히 쓰레기들을 차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잠시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트럭을 기다리게 했는지 청소부 한 명이 우리를 보고 잠시 손을 들어 웃어보이고는 오라이-라 외치며 바삐 지나갔다. 끊임없이 구호를 외치는 청소부의 모습 속에 아버지 얼굴이 겹쳐 보였다. 그들은 마치 홈플레이트에서 주자와 부딪히지 않기 위해 약간 비켜선 포수처럼 비스듬하게 쓰레기 수거용 차량에 매달려 있었다.

한국시리즈 7차전 마지막 날. 야구장의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용팀과 독수리팀이 0대0으로 팽팽한 신경전을 펼친다. 부상을 딛고 겨우 타석에 들어선 선수의 신기록 행진이 펼쳐지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원 아웃 만루. 그 선수가 들어서자 관중들은 야유 반 응원 반. 나는 맥주를 나르다 잠시 그 순간을 함께 한다. 100타석 연속 출루라는 자신의 기록, 그리고 팀을 위한 선택. 희생플라이, 공이 하늘을 향해 높이 솟는다. 외야수는 그 공을 잡지만 홈으로 던지지 않는다. 제로의 벽은 깨진다.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