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부문 당선작>

 
3년 전 나는 언니의 짐짝처럼 독일에 보내졌다. 첼로 유망주인 언니가 유서 깊은 음악학교의 입학허가서를 받았을 때, 엄마아빠는 머리가 나쁘고 평범한 나를 덩달아 독일에 보내기로 했다. 11시간 30분의 비행 동안 나는 한심함에 끙끙 앓았다. 쫓겨나듯 떠난 내 모습이 비행기 수화물 칸에서 덜컹대고 있을 캐리어와 다를 바 없었다.

언니는 기숙사에 들어갔고, 나는 클라우디아 할머니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다. 울타리가 낮고 화단이 잘 가꾸어진 이 층집이었다. 클라우디아 할머니는 영어를 할 줄 알았지만 독일어 억양이 잔뜩 묻어 알아듣기 힘들었다. 할머니를 따라 이 층 방으로 향했다. 옷장과 책상과 침대. 정말 기본적인 것만 갖춰진 방에서 짐을 풀며, 나는 왠지 눈물이 찔끔 났다. 정반대의 시간대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 것을 생각하니, 숨이 명치에 턱 걸렸다. 클라우디아 할머니는 결코 친절한 인상이 아니었다. 신경질적인 눈매 탓에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짚을 수 없었고, 독일어로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마다 내 욕인가 싶어 어깨를 움츠렸다. 옷을 개어 옷장에 다 넣었을 때쯤, 창밖에서 잔뜩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다보니 키가 크고 배 나온 중년 남자가 차 앞 유리에 묻은 새똥을 닦고 있었다. 클라우디아 할머니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또 시작이군. 불평만 할 줄 아는 오시.”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저녁을 차린다며 부엌으로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평만 할 줄 아는 오시’도 투덜거리며 옆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의 트라반트를 한참 바라보았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낡고 조그마한 차였다. 앞 유리에 새똥 자국이 하얗게 말라 있었다.

학교생활은 최악이었다. 나는 독일어를 할 줄 몰랐고, 내 또래 아이들은 대개 영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았지만 나와 말을 섞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눈 아픈 교과서는 펼쳐만 두고, 매 수업 벽에 붙은 시간표를 바라보았다. 몬탁, 딘스탁, 미트보흐…… 나는 시간표를 읽으며 독일어로 월화수목금을 외웠다. 점심시간엔 바글바글한 아이들 사이에 덩그러니 앉아있기 민망해 식당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기웃거렸다. 나 홀로 강강술래를 하는 듯했다. 둥그렇게 선 아이들 등 뒤를 빙빙 겉도는 느낌이었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림이 많은 책을 꺼내 펼쳐두고 책상 아래로 느릿느릿 과자 봉투를 뜯었다. 책을 정리하는 사서의 눈치를 보며 과자를 먹었다. 입안에서 비참함이 잘게 부서졌다. 매일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태풍에 학교 절반이 날아가는 상상을 했다.

어느 날 아침 집을 나서던 중 ‘불평만 할 줄 아는 오시’를 만난 적이 있다. 양복을 입은 그는 작디작은 트라반트에 몸을 욱여넣는 중이었다. 제대로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눈썹이 진하고 표정이 심드렁하며 덩치가 큰 사람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 그가 짧게 인사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오시 씨. 그러자 그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차에서 도로 내렸다.
“누가 나를 그렇게 부르라고 하든?”
그의 딱딱한 영어가 나를 쏘아댔다. 안 그래도 붉은 편인 그의 얼굴이 더 빨개진 것 같았다. 할로, 헤어 오시. 독일어 첫걸음 같은 회화책 맨 첫 장에 있을 법한 지극히 평범한 인사였다. 나는 당황해 입만 벙긋거렸다.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라.”
그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남기곤 다시 트라반트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그날 밤 인터넷 검색창을 뒤진 나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에 얼굴을 박았다. 오시(Ossi)는 그의 이름이 아니었다. ‘동독놈’이라는 뜻의 단어였다.

*

일주일이 지나 동독 박물관에 견학을 갔다. 아이들에게 뒤처져 맨 뒤에 서 있던 나는 가이드를 보고 흠칫 놀랐다. 옆집 아저씨였다. 그는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나는 그의 유니폼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읽었다. 실베스터 뮈헤.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알았다. 그를 따라 박물관 내부를 돌았다. 동독에서 생산한 통조림이나 레닌의 얼굴이 새겨진 식탁보가 있었다. 아이들이 떠드는 목소리에 실베스터 씨의 목소리가 묻혔다. 비밀경찰 슈타지의 도청실을 재현해놓은 곳에서 실베스터 씨는 입을 다물고 설명을 멈추었다. 아이들은 그가 설명을 멈춘 줄도 모르고 떠들었다. 누군가는 카를 마르크스의 흉상을 가리키며 웃어댔다. 그는 더 설명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아이들을 보는 그의 눈이 조금 씁쓸해 보였다.

“여러분 모두 통일 세대의 자식들입니다. 장벽을 부순 것은 여러분의 부모님이지만, 서독과 동독을 진정한 하나로 만드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교훈이 남는 말을 마지막으로 견학이 끝났다. 나는 우르르 박물관을 빠져나가는 아이들의 꽁무니를 쫓아갔다. 순식간에 허전해진 박물관을 돌아보았다. 동독의 가정집을 그대로 옮겨둔 곳에 실베스터 씨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천이 낡은 소파, 벽에 난 작은 구멍 너머로 보이는 부엌, 동독 서기장 호네커의 연설이 나오는 옛날 TV. 실베스터 씨는 박물관 직원이 앉혀둔 마네킹처럼 그 공간에 어울렸다. 벽지와 하나가 된 마냥 익숙해 보이기도 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착잡한 그림자가 알게 모르게 드리워 있었다. 불평만 할 줄 아는 오시. 나는 클라우디아 할머니가 실베스터 씨를 부르던 목소리를 곱씹었다.

*

언니와 나는 주말마다 포츠담 광장에서 만났다. 언니를 만나면 나의 초라함은 배가 됐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다. 언니가 독일어를 유창하게 했으니 나는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면 됐다. 카페 테라스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동안, 언니는 파티를 즐기다 귀가 시간을 어겨 사감에게 혼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부럽기보다 먼 세상의 일처럼 느껴져 대충 흘려들었다. 문득 나는 테라스 바깥으로 보이는 탑을 가리켰다. 바닷가가 아니라 도시 한복판에 잘못 자리 잡은 등대 같았다. 길쭉한 기둥 끝에 지붕이 달린 공간이 있었다. 저게 뭐지? 내가 중얼거렸다. 언니는 하던 말을 멈추고 내 손가락 끝을 쫓더니 대답했다.
“베를린 최초의 신호등이잖아. 저 안에 사람이 들어가서 수동으로 신호를 바꿨대.”
그제야 빨강, 노랑, 초록 동그란 세 전등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우뚝 선 신호등 탑이 왠지 슬퍼보였다. 그 안에 갇혀 신호를 일일이 바꿨을 사람을 떠올렸다.
언니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마음이 공허했다. 낡은 트라반트가 주차된 옆집을 지나쳤다. 커튼 틈으로 TV가 틀어진 거실이 보였다. TV 앞에 앉아 접시를 손에 들고 수프를 떠먹는 실베스터 씨가 보였다. 나는 모두가 떠난 박물관에 혼자 남아 있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주 잠시 그가 쓸쓸해 보였다.
클라우디아 할머니는 집에서 열 작은 파티의 초대장을 준비 중이었다. 마당발인 그녀는 동네 사람들의 이름을 막힘없이 적었다. 옆집 아저씨도 부르실 건가요? 내가 물었다. 그 오시 말이냐? 할머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인간이 싫어. 물론 모든 동독 사람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야. 내가 자주 가는 미용실 주인이 동독 출신이지. 하지만 옆집 오시는 지독하리만큼 전형적인 동쪽 사람이야. 투덜대기만 하고 말이지. 내가 생각하기엔, 아마 그의 집에는 아직도 레닌 사진이 있을 거야. 아니면 동독 국기가 걸려 있든지.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벗어나지를 못한다니까. 몰고 다니는 똥차도 봐, 언제적 트라반트람? 성격도 괴팍해. 그러니 딸이 아버지를 싫어하는 거야.”
“딸이요?”
“지금 스웨덴에서 일하고 있어. 통 찾아오질 않더군. 그럴 만도 하지.”
나는 쓸쓸하게 식사하던 실베스터 씨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

베를린 신호등은 희한하게 생겼다. 신호등에 그려진 사람 형체가 한국에서 보던 밋밋한 사람 형체와 달랐다. 모자를 쓴 주먹코 남자가 신호등마다 들어있었다. 암펠만(Ampelmann)이라고 불리는 캐릭터였다. 나는 낯선 건물이나 사람들보다 신호등에 더 눈길이 갔다. 암펠만은 나의 우울한 베를린 생활에 소소하게 활력을 주었다. 나는 초록불을 기다릴 때마다 암펠만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초록불에 그려진 암펠만은 짧은 다리를 뻗어 걷는 모양인데, 횡단보도를 건널 때 나도 모르게 그 걸음걸이를 따라하곤 했다. 자전거 전용 도로의 신호등 속 자전거를 탄 암펠만이나 우산을 쓴 암펠만처럼 가끔 볼 수 있는 특이한 모양을 찾아내는 것도 나름 재미였다. 어느 날 하교를 하던 중, 암펠만이 누군가를 닮았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러나 정작 그 누군가를 떠올릴 수 없었다. 내가 아는 누군가를 닮은 것은 확실하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클라우디아 할머니의 부탁으로 화단에 물을 주는 동안, 나는 암펠만을 닮은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울타리 밖에 다섯 명의 남자애들이 서 있었다. 같은 과학 수업을 듣는 애들이었다. 그 애들은 시선을 나에게 고정한 채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무슨 말이든 독일어는 죄다 목구멍을 긁어대는 소리로 들렸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고 이를 드러내 최대한 웃어 보였다. 그러자 남자애들은 허리를 젖혀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때 옆집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성을 냈다. 실베스터 씨였다. 소파에서 막 배를 긁다가 나온 차림으로 남자애들에게 화를 냈다. 목에 핏대가 서고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것을 보며, 1초만 더 화를 내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애들은 입을 비죽이며 물러갔다. 물뿌리개에서 물이 졸졸 새는 것도 까먹고, 눈을 껌뻑이며 실베스터 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멀어지는 남자애들의 뒤꽁무니를 끝까지 쏘아보다가, 그 바리톤 같은 성량으로 내게 성내기 시작했다.
“넌 머저리냐! 왜 괴롭히는 놈들 얼굴에 대고 실실 웃어!”
나는 물뿌리개를 맥없이 내려놓았다. 내가 씩 웃었을 때 그들의 눈에 얼마나 우습게 비췄을 지 곱씹었다. 풀이 죽어 실베스터 씨를 뒤로하고 집에 들어갔다.

노을이 동네의 모든 지붕을 물들일 때까지, 나는 침대에 엎어져 있었다. 말이 통하고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모멸감이 등을 짓눌러 일어날 수 없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클라우디아 할머니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애 좀 먹이세요. 쬐깐해서 뭐든 먹여야겠군요.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분명 실베스터 씨의 목소리였다. 그날 저녁 식탁에선 처음 보는 냄비에 담긴 고기 스튜가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

겨울을 알리는 듯 마당의 나무가 앙상해졌다. 주말 아침에 대문을 나와 마주친 것은 실베스터 씨였다. 그는 허망한 표정으로 트라반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내가 물었다. 그는 나를 슥 흘겨보더니,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동이 걸리지 않아. 나는 어떤 대답을 돌려주는 게 적절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조용히 그의 옆에 서 있었다. 굴러가는 게 신기했던 구식 자동차였기 때문에 ‘그렇군요.’라고 대답한 뒤 지나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트라반트의 지붕을 쓸었다. 단종된 지 오래된 놈인데……. 정적이 이어졌다. 정적을 깬 것은 실베스터 씨였다.

“통일 후에 동베를린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동차를 바꾸는 것이었어. 트라반트를 몰고 돌아다니면 서독사람들이 하찮게 바라봤거든. 그래도 동독에선 상징 같은 차였는데 말이야.”
“아저씨는 왜 안 바꾸셨어요?”
“눈치 보기 싫었으니까. 트라반트를 버린 동네 친구와 사이가 틀어진 적도 있지.”
나는 그제야 트라반트를 바라보는 그의 애틋한 눈을 이해할 수 있었다. 파실 건가요? 나의 물음에 실베스터 씨는 한참 대답이 없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잘 모르겠구나. 오래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
“이제 생각났어요.”
“뭐라고?”
“아저씨, 암펠만 닮았어요.”

*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해 실베스터 씨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그는 장벽 붕괴 소식을 접하고 그곳으로 달려간 인파 중 하나였다. 그는 더 넓은 세상을 가로막던 벽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자신이 평생 살아온 세계가 무너지는 기분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역시 장벽에 대고 망치를 휘둘렀다. 실베스터 씨는 망치를 휘두르던 쾌감과 벅참을 기억했다. 입을 벌린 채 그 광경을 바라보던 국경경비대원의 얼굴과, 무너지는 장벽 반대편에서 악수를 건네던 서독사람의 손도 기억했다. 그의 거실 탁자 위엔 액자에 소중히 끼워진 신문 사진이 한 장 있었다. 곱슬머리를 무스로 넘기고 가죽점퍼를 껴입은 남자가 장벽을 부수는 사진이었다. 실베스터 씨는 그 남자가 자신이라고 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딘가 심드렁한 눈매와 두툼한 코가 딱 그였다. 우리는 베를린 장벽이 기념처럼 남겨진 곳에 찾아갔다. 금이 간 장벽 위에 평화를 상징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장벽이 시작하는 곳에서 동쪽으로 걸어갔다. 한때는 이 너머 세계가 아득하게 느껴졌는데. 그가 중얼거리며 서쪽으로 몇 걸음 걸어왔다.

장벽 틈새로 자본주의가 물처럼 흘러들었다. 실베스터 씨의 딸 소냐는 동독식 햄버거인 그릴레타를 좋아했다. 그는 쉬는 날이면 소냐의 손을 잡고 나가 그릴레타를 사주었다. 어느날 그는 늘 그릴레타 트럭이 서 있던 자리에 맥도날드가 들어서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게 뭐야? 라고 묻는 소냐에게 실베스터 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마트 진열대에 서독 물품이 빽빽하게 찬 것을 보고, 구석으로 밀려난 동독 물품을 찾아 온 마트를 헤집었다.
실베스터 씨는 내게 바나나가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서독사람들은 너도 나도 트럭을 몰고 바나나 장사를 했다. 바나나가 귀했던 동독사람들은 그것을 불티나게 팔아주었다. 실베스터 씨도 처음엔 줄을 서가며 바나나를 샀지만, 길게 늘어선 줄을 지나치던 어느 서독 부부의 대화를 듣고 더는 사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다.
멍청한 오시들. 바나나 한 송이를 오십 송이 가격에 사 가네.

모든 것이 서독을 중심으로 변해가자 실베스터 씨는 박탈감을 느꼈다. 그는 통일 후 생산이 중단된 과자가 먹고 싶어 우는 소냐를 달래는 일이 몹시 힘겨웠다고 했다. 그리고 동독 마르크로 모아온 재산을 서독 화폐로 바꾼 날, 은행을 빠져나오며 느낀 심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까지 덧붙였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이 흐릿하게 지워지는 것 같았다. 당연한 일상이자 추억이었던 것들이 하나둘 사라지자, 그는 우울하기까지 했다.

실베스터 씨는 저녁을 차려 나와 함께 식사하곤 했다. 나는 자주 그의 집에 놀러 가 밥을 먹고 혼란스럽던 시대의 이야기를 들었다. 적적하던 그도 나와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루는 그가 신호등과 얽힌 인생에 대해 들려주었다.

실베스터 씨는 할아버지 프랑크의 손에서 자랐다. 젊은 시절 프랑크 씨는 베를린 최초의 신호등에서 일했다. 그는 매일 10시간이 넘도록 신호등 탑 꼭대기에서 수동으로 신호를 바꾸었다. 신식 신호등이 도입될 때까지 약 5년간 포츠담광장을 한눈에 내다보며 성실히 근무한 그는, 최초의 신호등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실베스터 씨는 어릴 적부터 귀가 신호등 이야기로 포화상태였다. 신호등 탑을 떠난 후의 프랑크 씨는 실적이 좋지 않은 방문판매원이었다. 실베스터 씨는 키가 무럭무럭 자랄수록 할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키가 프랑크 씨를 훌쩍 넘은 고등학교 시절엔 신호등 이야기가 지겨워 가출을 감행했다. 실베스터 씨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프랑크 씨는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종종 말없이 사라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발견된 곳은 포츠담광장의 신호등 탑 아래였다. 대충 구겨 신은 신발과 잠옷 차림으로, 과거의 영광이 서린 신호등 아래서 침을 흘리고 있었다. 실베스터 씨는 처음엔 가슴이 무너졌다고 했다. 하지만 그 후로 같은 일이 반복되자 차라리 신호등 탑이 무너지길 바랐다. 그는 길지 않은 결혼 생활을 끝내고 갓 태어난 소냐와 덩그러니 남게 되면서, 프랑크 씨를 요양원에 맡겼다.

실베스터 씨가 마지막으로 프랑크 씨를 찾아갔을 때, 정신이 희미하게 돌아온 프랑크 씨는 늘 그랬듯 실베스터 씨에게 베를린 최초의 신호등 이야기를 했다. 실베스터 씨는 얼굴이 서럽게 일그러지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지겨운 신호등 타령을 하자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실베스터 씨는 냉정하게 부정했다.
“그만 하세요. 최초의 신호등은 기억되겠지만, 그 안에 갇혀 일했던 최초의 사람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자 프랑크 씨의 눈은 먼지가 낀 것처럼 흐려졌다. 그는 바짝 마른 입으로 말했다.
그래서 너는 나를 잊을 테냐? 네가 나를 기억하면 그만이란다. 이 세상에 기억되지 않는 것은 없단다.

서독에 삼켜지는 동독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실베스터 씨뿐만이 아니었다. 그 우울감은 동독(Ost)과 노스텔지어(Nostalgie)를 합한 ‘오스탈기(Ostalgie)’라는 합성어까지 만들어냈다.
“원래 암펠만은 동독 신호등에 그려진 캐릭터였단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서독에 흡수되던 어느 날, 실베스터 씨는 신호등이 서독과 동일한 것으로 전면 교체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머리 끝까지 쌓아둔 감정이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동독사람들의 머릿속에 뚜렷한 암펠만을 마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 마냥 지워버리다니. 실베스터 씨는 프랑크 씨가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오스탈기를 앓는 사람들이 꾸린 단체에 가입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암펠만 구출하기’ 운동을 펼쳤다. 운동이 힘을 얻어 구 동독 지역에 그치지 않고 베를린 전역에 암펠만이 쓰일 때까지, 단체는 신호등 교체 아이디어를 낸 서독 출신 정치인에게 항의 편지를 보내고, 동독사람들에게 암펠만은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렸다.
“날이 갈수록 단순히 암펠만을 지키는 것뿐 아니라, 다들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지. ‘우리의 삶을 부정하지마!’라고…….”

나는 더 이상 실베스터 씨를 암펠만과 닮았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암펠만을 지켜낸 역사의 일부였다.

*

안녕, 소냐. 많이 바쁜 것은 알지만 이번 크리스마스는 나 혼자가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독일에서 가장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실베스터 씨는 소냐의 자동응답기에 음성을 남겼다. 프랑크 씨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소냐도 실베스터 씨를 이해하지 못했다. 동독 시절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빠를 창피하게 여겼다. 무엇보다 아빠의 트라반트를 부끄러워했다. 사라져가는 동독 것만 고집하는 아빠의 모습을 싫어했고, 그런 아빠가 동네 사람들에게 오시라고 불리는 것도 싫어했다. 실베스터 씨는 스웨덴에서 일하는 소냐에게 주기적으로 전화한다고 했다. 통화가 2분을 채 넘기지 못한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실베스터 씨를 수치로 여긴 소냐는 일찍이 집을 떠났다. 그리고 삼 년 전 마지막으로 다녀갔다. 실베스터 씨는 쓸쓸한 시간과 홀로 보내는 명절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나는 독일 생활을 정리했다. 언니가 겨울방학을 맞아 귀국할 때, 나는 아주 돌아가기로 했다. 성과 없는 나의 도피유학에 엄마아빠는 내게 돌아오라고 말했다. 나는 실베스터 씨에게 귀국 사실을 섣불리 밝힐 수 없었다. 소냐가 오지 않으면 나와 실베스터 씨는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낼 계획이었다. 그는 간만에 온기 있는 명절을 보낼 생각에 들떠 보였다. 그새 나에게 실베스터 씨는 따뜻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마냥 행복하지 않은 이유도, 다시 혼자가 될 그가 마음 한편에 묵직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마지막 밤이 깊을 때까지 귀국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옷장의 옷을 모두 개어 캐리어에 쌓고, 클라우디아 할머니와 마지막 저녁 식사를 할 동안, 옆집에서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홀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내 방에서 창밖을 내다보니 주차된 그의 트라반트가 눈에 들어왔다. 마음이 저렸다.
나는 크리스마스를 이틀 남겨두고 귀국했다. 떠나는 날 이른 아침, 그의 현관 앞에 크리스마스 카드와 그림을 내려놓고 왔다. 암펠만을 따라 그리고 실베스터 씨의 눈코입을 그려 넣은 그림이었다. 카드에는 나의 이메일 주소와 함께, 갑작스레 떠나 미안하다는 말을 적어두었다. 그리고 소냐와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길 바란다는 추신도 잊지 않았다.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에서 나는 창밖 풍경을 눈에 담았다. 무수히 많은 신호등 속 암펠만과 포츠담광장의 신호등 탑. 코끝이 시큰거렸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는 구름에 가려 점점 아득해지는 베를린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희미해진 베를린에게 손을 흔들었다. 박물관 속 동독 가정집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던 실베스터 씨가 문득 떠올랐다.

*

나의 소리 없는 이별을 원망하는 이메일을 시작으로, 우리는 한동안 답장을 주고받았다. 내가 떠난 그 겨울, 실베스터 씨는 홀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고 했다. 나는 그다음 해 성탄절에, 명동의 크리스마스트리를 찍어 보냈다. 그의 이메일에선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말이다. 내가 대학 합격 소식을 알렸을 때 그는 독일 과자가 가득 담긴 소포를 보내기도 했다. 이따금 실베스터 씨는 내가 떠난 베를린의 풍경을 찍어 보여주었다. 우리의 이메일은 뜸하기도, 잦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포털사이트의 비밀번호를 분실했다. 내 일상은 바쁘게 굴러갔다. 나의 부주의로 끊긴 연락이 아쉽고 실베스터 씨의 소식이 궁금할 때도 있었지만, 나는 그가 잘 지내리라 믿었다. 몇 해를 더 지나 또 다른 새해를 맞이했을 때, 나는 비밀번호를 되찾았다.

메일함에 들어가니 실베스터 씨가 보내온 소식이 잔뜩 쌓여있었다. 나는 벅차면서도 미안한 마음으로 그것들을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그가 일하는 동독 박물관이 훌륭한 유럽 박물관상 후보에 오른 이야기나, 더는 굴러가지 않는 트라반트를 세차한 이야기, 파견 간호사 출신 이민자가 운영하는 한식당을 찾은 이야기. 갈수록 그는 답장이 없는 나의 안부를 걱정스럽게 물었다.

가장 마지막 메일은 며칠 전 크리스마스에 온 것이었다. 그가 딸 소냐와 함께 산타 모자를 쓰고 와인잔을 든 사진이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전구를 감은 크리스마스트리 너머로, 그의 거실 벽에 붙은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코입이 그려진 암펠만이었다. 나는 행복하게 웃으며 답장 버튼을 눌렀다. 손가락 끝에 벅찬 마음을 실어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오랜만이에요. 베를린 신호등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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