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 UN본부에 각국의 기(旗)가 게양돼 있다. 오늘날의 국제사회는 각각의 주권국가가 모여 형성됐다.
2018년, 한반도는 늘 그렇듯 격동하고 있다. 다만 이전까지의 상황이 일촉즉발의 긴장 속 격동이었다면 이번 변화의 성격은 그렇지 않다. 올해 1월 김정은이 신년사를 통해 경색된 남북관계의 회복 의사를 밝힌 후 지속적으로 남북 간 접촉이 이어졌고 그 결과 북미 정상회담과 세 차례의 남북 정상 간의 만남이 성사됐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변화들이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 보장할 수는 없다. 이전에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일시적인 평화를 불러오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2018년 한반도에 불어온 새로운 변화는 평화를 향한 격동임에 분명하다. 복잡하게 얽힌 국제사회 안에서 끈질긴 ‘외교적 협상’을 통해 전쟁의 위협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평화적 공존을 위한 방법을 함께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하기 때문이다.

외교교섭: 국제사회 변화의 출발점
앞서 말했듯 한반도의 변화 조짐이 일시적인 평화, 이를 넘어 통일로 연결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노력의 정도에 따라 앞으로 만들어질 새로운 세상의 모습에 영향을 줄 수는 있다. 그만큼 국제사회에서 양자 간 혹은 다자 간의 대화 방식인 외교교섭의 중요성은 크다고 할 수 있다.

국가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구체제를 개혁하기 위해서도 당사국 간의 외교교섭은 필수적이다. 양국의 이익이 상충하는 단계에 이르기 위해 실무자들의 협상이 선행돼야하고 최종적으로 정상 간의 약속과 협의가 진행돼야만 의미 있는 외교적 성과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국내의 여러 목소리도 감안해야 한다는 점에서 외교교섭은 민감하고 어려운 작업이지만 국제사회의 체제 변화와 개혁의 출발점으로서 의미가 있다.

국제사회의 과거와 구성
외교교섭은 국제사회가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그러나 오늘날과 비교하면 외교활동 범위가 좁은 지역에 국한돼 있었고 외교의 주체도 오늘날의 것과 달랐다.

고대와 중세사회가 그렇다. 외교의 형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적인 요소가 갖춰져야 하고 그러한 요소를 갖추기 위해서는 경제적 요건이 먼저 충족돼야 한다. 그러나 고대사회의 공동체에게 있어 최우선적으로 당면한 과제는 다름이 아닌 ‘생존’이었다. 이들 공동체는 경제적 부와 여유를 누릴 틈도 없이 타 공동체와 생존을 둘러싼 경쟁을 벌여야 했다. 경제적 풍요에 기반한 국제사회적 요소들을 갖추기에, 이들 고대사회의 공동체들은 어려운 조건 하에 놓여 있었다.

권위체의 종류 역시 복잡하고 다양했다. 중세사회에는 주권국가 외에 주권국가의 권위를 능가하는 ‘초국가적 권위체’가 존재했다. 유럽사회의 종교 지도자인 교황과 이슬람세계의 칼리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국가 단위가 아닌 종교를 기반으로 하는 초국가적 권위체로서 군림했다. 초국가적 권위체와 여러 개의 지역 권위체로 구성된 중세사회 안에서 각각의 권위체들은 때로는 독자적이고 때로는 종속적인 관계를 맺어나갔다. 주로 주권국가를 위주로 국제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현대사회와는 다른 모습이다.

 
국제사회를 움직이는 힘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적 국제사회가 출현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이를 두고 많은 해석이 존재하지만 보통 17세기 중반에 체결된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phalia)이 근대적 국제사회의 탄생의 시발점으로 인식된다.

16세기 이후부터 유럽 내부에는 기존 카톨릭(구교)의 폐단을 개혁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나타났다. 이러한 시도는 후에 각각 구교와 신교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의 전쟁으로 확대됐고 최초의 국제적 규모의 전쟁인 30년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은 구교 세력에 불리하게 진행돼 유럽 내 구교의 권위와 영향력을 상실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전쟁 이후, 당사국들은 교황과 구교를 중심으로 하는 구체제를 거두고 주권국가를 국제사회의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의 탄생을 외교적 해법을 통해 실현한다. ‘최초의 근대적 외교교섭’인 베스트팔렌조약은 그렇게 체결됐다.

베스트팔렌조약은 국제사회에서 외교교섭의 역할과 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교섭을 통해 기존 국제사회의 중심에 있던 교황(초국가적권위체)을 새로운 체제에서 탈락시켰으며 주권국가 단위가 체제의 주인이 되는 새로운 질서를 확립시켰다. 교섭의 과정을 단지 ‘이미 정해진 사안의 확인 과정’ 또는 ‘형식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국가 간의 공식적인 약속 혹은 협의라고 할 수 있는 교섭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실질적인 힘을 갖는다. 앞서 봤던 것처럼 17세기 독일(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한 도시에서 맺어진 약속이 유럽을 종교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키기도 했다.

현대의 국제사회와 지도자의 역할
현대사회에 들어와서도 국제사회를 구성하고 외교교섭의 주체가 되는 기본 단위는 여전히 주권국가다. 이에 따라 주권국가의 외교적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각국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또한 국가의 외교정책이 지도자의 외교방식과 신념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 잦아졌다. 이렇듯 외교의 방향에 대한 각국 지도자들의 가치관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외교방식이 더욱 다양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외교방식이 다양해졌다는 것은 예측불가능성이 커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1962년 카리브 해에서 비롯된 ‘쿠바 미사일 위기’는 현대사회가 지닌 예측불가능성과 국가 지도자의 외교적 판단이 국제사회에 미칠 수 있는 파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줬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국제사회는 미국과 소련의 대립 구도인 냉전의 질서 안에서 유지됐다. 양국 간 물리적 대립은 피하면서 서로의 세력을 견제하는 것이 냉전체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1962년, 소련이 미국과 바로 인접한 쿠바에 기지를 건설하고 미사일을 배치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서 미국은 심각한 안보위기를 맞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강경한 외교 대응 정책을 선택했다. 그는 언론 매체를 통해 소련의 미사일 배치를 비난하는 한편 군사적인 대응방안으로 쿠바가 인접한 카리브 해의 영해를 봉쇄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국가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소련과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 표현이었다. 다행히도 쿠바와 카리브 해 해상에서 소련이 철수함에 따라 전쟁은 피할 수 있었지만 핵무기를 비롯해 군사·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탓에 당시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의 공포에 한동안 불안해 할 수밖에 없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국제사회에 미친 파장도 컸다. 그로부터 2년 후 소련의 최고 지도자인 니키타 흐루쇼프가 실각한 이유가 됐고 쿠바와 소련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냉각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대화를 통해 세상 바꾸기
이처럼 외교교섭은 전 세계와 유기적으로 연결돼있으며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여러 국가의 역사와 이익이 충돌하는 한반도에서 국제체제의 변화를 포착하고 서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무척이나 중요하다. 이때 필요한 것이 타국과의 대화, 즉 외교교섭이다. 대화하지 않고는 상대방의 사고와 이해관계를 정확히 집어낼 수 없듯이 외국과 교섭하지 않고는 상대국이 원하는 이익의 선과 관계의 변화를 알 길이 없다. 마음과 귀를 열고 대화의 자리에 나가는 것이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구축하고 더 나은 세상으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성기태 기자 gitaeuhjin0330@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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