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책의 해’ 특집

 
텍스트를 담아라!

 “기록되고, 분석되고, 요약되고, 정리된 정보를 설명하고 논의하는, 그림이 첨부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 딱딱한 표지를 씌운, 표지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는 머리말, 소개, 목차, 인덱스가 있고 인간지식을 높이고, 풍성하게하며 계몽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시각 기관을 통해 전달되는, 어떤 사람에겐 촉각 기관을 통해 전달되는 물건이요!” 인도영화 <세 얼간이>(2009)의 주인공 란초는 책을 이렇게 정의했다. 책에 대해 길고 거창하게 표현한 데서 관객들은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책의 기능을 이렇게 장난스럽고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나 잠시 웃음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란초의 이런 말이 꼭 장난으로만 가득 찬 것은 아니다. 그의 말에서 몇몇 거창한 표현을 지우고 나면 책을 정의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가 남기 때문이다. 바로 ‘기록’과 ‘전달’이다.

책은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지만 보통 기능을 기준으로 정의한다.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과 같은 텍스트를 기록하는 것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이다. 책을 만드는 목적과 책 그 자체의 의미가 바로 이 텍스트를 녹여내고 담아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반면 란초의 말처럼 책의 표지, 즉 책의 물리적 모습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부차적인 가치에 불과할까? 이런 의미에서 책의 물리적 형태를 텍스트를 담아내는 그릇에 비유하고 싶다. 책의 근본적인 기능이 담겨있다 한들 질 떨어지는 그릇에 담긴 텍스트를 누가 읽고 싶어 한단 말인가. 이제 텍스트를 ‘파피루스, 양피지, 코덱스, 종이책’ 이라는 각각의 그릇에 담아 전달하려 한다. 텍스트를 기록하고 그릇에 담아 전달하는 것. 그것이 책의 정의다.

▲ <라스코 동굴벽화- 기원전 15000년>
▲ <파피루스- 기원전 800년>
어떤 그릇에 담을래?

책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언제일까? 답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사람마다 책의 형태로 인정하는 기준이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지금처럼 종이다발을 인쇄해 하나로 묶은 형태의 모습만을 책으로 인정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무엇인가를 기록하는 책의 기능을 다했다면 그것이 점토판이던 벽화이던 모두 책으로 본다. 이러한 의견을 모두 반영하면 책이 최초로 만들어진 시기는 원시인들이 벽화를 그렸던 3만 5000년 전부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발명된 1450년 사이의 시기 중 기준과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유일한 차이는 텍스트를 담는 그릇의 형태가 각각 다르다는 점이다. 어떤 그릇을 인정할지는 순전히 우리의 몫이다.

벽화에서 코덱스까지

만약 책의 인정 조건을 ‘기록적 요소가 존재하는가?’로 넓게 설정한다면 최초의 책은 약 3만 5000년 전의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석기시대부터 인류는 그림이나 기호를 동굴 벽에 남김으로써 기록 활동의 역사를 열었다. 이들에게 기록한다는 것은 상징(symbol)을 남긴다는 의미였다. 이들은 추상적이고 함축적인 몇 가지 그림과 기호를 이용해 사냥의 모습, 여성 인물상 등을 벽화에 남겼다. 사냥의 모습을 남긴 것은 성공적인 수렵활동의 기원을 또 여성 인물상을 그린 것은 다산(多産)을 빌기 위한 의례적 상징성을 담은 것이었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보편적 책의 모습에 비해 기술적으로 상당히 부족하고 기록의 질이 정교하지 못해 책으로서 인정받기에 무리가 있다는 의견이 크지만 당시의 기록적 산출에 대한 욕구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왔음은 분명하다. 이들의 의례적 기록 활동이 시대를 타고 내려가 기록 문화발전의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후 농경사회의 점토판을 거쳐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파피루스와 양피지를 이용한 기록역사가 시작됐다. 초기단계이지만 국가의 형태가 갖춰지기 시작한 당시의 사회에서는 통치에 필요한 서류로서 기록의 중요성이 컸다. 점토판을 이용해 기록을 남기는 방법이 있었지만 파피루스 줄기를 이용해 만드는 파피루스나 양의 가죽으로 만드는 양피지에 기록하는 방식이 더 편리했다. 파피루스와 양피지의 발명은 중국으로부터 제지술이 들어오기까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널리 사용됐고 종교문화와 문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학문의 중심이 종교문화에서 문학과 과학으로 옮겨가는 시기에는 파피루스와 양피지 또한 기록에 적절한 그릇이 아니었다. 애초에 파피루스와 양피지는 사무를 위한 두루마리 형태로 제작돼 긴 글을 작성하기에 불리했다. 이러한 결점을 극복하기 위해 찾은 대안이 바로 ‘코덱스’이다. 코덱스는 쉽게 말해 현대 책 형태의 뿌리다. 코덱스 또한 파피루스와 양피지를 사용했지만 그 형태는 달랐다. 긴 글도 기록에 남길 수 있도록 두루마리의 형태에서 벗어나 오늘날의 책처럼 여러 장의 양피지를 엮어 책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책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묻는다면 코덱스의 출현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답할 수 있다.

▲ <성서 코덱스- 9세기>
▲ <구텐베르크 성서- 15세기>
인쇄혁명과 책의 변화

인류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혁신적인 발명을 꼽으라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은 강력한 후보가 될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새롭게 창안한 인쇄술이 출판업이나 문헌 분야를 넘어 사회 저변에 걸쳐 파격적인 변화를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독일 출신의 세공업자였던 구텐베르크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기존 목판인쇄술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방법을 찾던 중 인쇄용 금속활자를 나무틀에 심어 인쇄하는 새로운 인쇄술을 개발했다.

새 인쇄술의 효과는 대단했다. 인쇄과정은 훨씬 간편해졌고 필요한 노동력과 시간도 감축됐다. 책의 대량 인쇄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인쇄혁명 초기에 구텐베르크 인쇄술은 교황과 교회의 위신을 높이기 위한 종교서적 발행 도구로 이용됐지만 민주적 사상의 발전 역시 함께 스며들어 사회 전분야에 걸쳐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어 냈다. 아이러니하게도 구텐베르크 이후 발전된 인쇄술은 유럽 종교개혁의 사상적 발전에 큰 도움을 줬으며 교황과 카톨릭교회의 몰락을 이끈 선구적 기술로 자리매김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 이후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책의 형태는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량 인쇄된 종이책’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책이 외형적 변화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전례 없던 형태인 전자적 글쓰기의 한 유형으로 전자책 개념이 도입되는 등 책의 형태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앞선 사례에서 찾을 수 있듯이 텍스트를 기록하는 책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그 텍스트를 담아내는 그릇은 기술과 학문의 발전에 의해 변할 수 있다. 4차산업혁명과 같은 기술적 혁신을 눈앞에 둔 현실에서 책에 대한 단순한 정의를 고집할 수는 없다. 벽화에서 종이책에 이르기까지 책은 몇 번의 변화를 거듭했던가.


성기태 기자 gitaeuhjin0330@uos.ac.kr
참고도서_ 우베 요쿰, 「모든 책의 역사」, 박희자 역, 마인드큐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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