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널 포트레이트(2018)

 
무언가 뜻대로 안 풀린다는 듯 심각한 낯빛, 자신만의 기준을 설정하고 그 기준에 미달하는 것들을 가차없이 폐기하는 완벽주의, 명예와 부를 얻은 뒤에도 자신의 7평 작업실에서 떠나지 않은 완고함. 우리가 예술가를 정의 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들에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만큼 정확히 부합하는 예술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런 예술적 기벽을 잘 보여주는 한 일화가 있다. 자코메티는 어느날 작가 제임스 로드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자코메티는 한나절이면 초상화를 완성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작업은 장장 18일 동안 이어진다. 얼마나 대단한 초상화이길래 그토록 오랜 시간동안 붙잡고 있어야 했을까. 로드는 작가라는 직업에 걸맞게 이 과정을 글로 남겼다. <파이널 포트레이트>는 그 18일 간의 기록을 담은 영화다.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다

영화의 주 무대는 자코메티의 작업실이다. 어둑한 작업실에 잿빛 석고상들이 즐비해 있다. 여러 작업물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가운데 자코메티는 로드를 앉혀놓고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한나절이면 충분할 것이라던 자코메티의 호언은 이후 “오늘은 이정도까지만 하지”라는 말로 바뀐다. 처음부터 넉넉하게 3주쯤 걸린다고 말했으면 좀 좋았을까. 자코메티는 계속 하루 이틀만 더하면 충분하다고 로드를 안심시킨다. 그러다 로드가 뉴욕으로 떠날 시간이 되면 이제 좀 시작해볼 수 있겠다면서 은근슬쩍 떠나려는 로드를 압박한다. 이 과정이 대여섯 번 반복되자 알고도 속아주던 로드도 슬슬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한다. 결국 로드는 18일째 자코메티에게 작품이 이정도면 훌륭하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하고 나서야 겨우 뉴욕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보다, 그리다, 지우다

대개 초상화에서 가장 공들여 묘사되는 신체부위는 얼굴이다. 이럴 때 얼굴은 단순히 우리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의 본질적인 면들을 보여주는 창구로서 기능한다. 프랑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을 “내 안에 있는 타자에 대한 관념을 뛰어넘어 타자가 나타나는 방식”이라 정의한 바 있다. 타인의 얼굴에서 그 사람만의 고유성을 읽어 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얼굴을 정확하게 그려내려는 시도는 상대방에게 “당신은 누구인가요?”라고 묻고 답을 구하는 과정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대체로 이런 질문에 제출되는 답변은 부정확하다. 영화에서는 이것이 ‘보다’와 ‘그리다’ 사이의 간극으로 표현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보고 있다고 착각할 때, 대체로 그 대상의 이미지는 우리가 그려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 중 하나다. 실제로 우리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상을 왜곡시키거나 이상화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렇게 발생하는 간극을 봉합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입견을 걷어내야 한다. 그 과정은 영화에서 초상화에 그려놓은 선들을 다시 흰 페인트로 지워내는 단계에 상응한다. 기껏 그려놓고 다시 지워버리는 자코메티의 행동은 어떤 측면에서는 답답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대상을 오해하지 않으려는 자코메티의 고집’으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겹겹이 쌓인 페인트의 두께는 대상을 온전하게 파악하려는 그의 열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반복, 또 반복

영화의 내용을 자코메티가 우여곡절 끝에 초상화를 완성하는 이야기라고 요약해버리는 것은 조금 마뜩찮다. 정작 자코메티는 자신의 작품이 한번도 완성됐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초반부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자코메티가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초상화를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해. 단지 그리려고 노력할 뿐”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상대방을 이해하는 과정으로 유비시켜 본다면 이 말은 이렇게 변형될 수 있지 않을까.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해. 다만 이해하려고 노력할 뿐” 타인에 대한 이해는 점근선적으로만 이뤄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섣부르게 상대방에 대해 다 알았다고 단언하는 것은 사실 상대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누군가 당신의 내면까지 완벽히 탐사했다고 의기양양하게 외칠 때, 자코메티는 당신의 표면을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지 않을까.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계속될 수 있는 것은 후자의 경우뿐이다. 자코메티가 세상을 떠난 지 50여 년이 흘렀지만, 우리사회는 여전히 자코메티를 필요로 한다.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던 자코메티를.


김세훈 기자 shkim7@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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