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우리 대학의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 대학은 1918년 지금의 청량리역 일대에서 개교한 경성농업학교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일제하 각 지방마다 설립된 농업학교에서 기원한 대학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역사를 거기서부터 보는 학교는 우리 대학이 거의 유일하다. 다른 대학의 경우 광복후 여러 학교를 통합하여 대학을 설치했기 때문에 대부분 대학의 역사를 통합 시점, 즉 광복후 어느 해부터 따지게 된 것이다.

그에 반해 우리 대학은 다른 학교와의 통합 없이 경성농업학교가 광복후 서울농업중학교를 거쳐 농업대학으로 승격했으며, 다시 사회와 도시의 변화에 부응하여 서울산업대학, 서울시립대학교로 확대·발전해 왔다. 이런 까닭에 자연스럽게 ‘학교사 100년’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필자는 작년부터 학교 100년사 책자 집필, 박물관을 중심으로 한 서울시립대학교역사관 개관 등 개교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부에 관여하며 지금껏 잘 몰랐던 학교사의 여러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1932년 ‘소척대(蘇拓隊) 사건’ 같은 것이 있다.

소척대란 원래 경성농업학교의 한국인 학생을 중심으로 한 농촌계몽단체였다. ‘소척’이란 ‘조선의 소생, 농촌의 개척’이라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 경찰은 ‘조선의 소생’이라는 뜻을 불온하게 여겨 소척대를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로 규정하고 학생들을 체포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그 동안 우리 대학의 역사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었으나 이번에 사건과 관련된 경찰심문조서를 발굴하고 현재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서 경성농업학교 학생의 카드를 확인함에 따라 학교사의 집필이나 역사관 전시에 반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사료를 보면 일제는 학생들이 소척대 같은 단체를 조직한 배경으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들고 있다. 광주학생운동은 지방에서 시작되었지만 전국을 휩쓴 대규모 항일학생운동이었다. 그리고 경성농업학교에도 이 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당한 학생들이 있었다. 일제는 이런 항일 운동의 전통을 소척대가 계승했다고 본 것이다.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당한 학생 중에는 설정식(1912-53)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이어갔으며 나중에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1932년부터 시를 발표하여 근대 문학사의 중요 시인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설정식은 광복후 좌익에 가담했다가 월북한 후에는 북한에서도 숙청되어 오랫 동안 남북 양쪽에서 금기시되어왔다. 말 그대로 분단 현실에 짓눌린 ‘비운의 인물’이라고 하겠다.

안타까운 것은 1929년 입학하여 퇴학당하기까지 경성농업학교를 다닌 기간이 불과 몇 달에 불과하여 학교와 관련한 별다른 흔적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결국 학교사에는 간단한 한 줄의 언급에 그치고 말았다. 하여 우리 대학의 역사 속에 기록하지 못한 이런 인물도 있었음을 여기에 적어본다. 누구라도 적절한 자리를 찾아 기록해주는 것은 역사가가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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