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로의 대우에 관한 1949년 8월 12일의 제네바협약.
‘포로는 항상 인도적으로 대우되어야 한다.’ 제3차 제네바 협약인 ‘포로의 대우에 관한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협약’에 나와 있는 문구다. 1950년 발발한 6·25전쟁은 이 협약이 적용된 최초의 전쟁이다. 이 협약이 6.25전쟁에서 완벽히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이전보다 많은 자유가 포로들에게 보장된 것은 분명하다. 수용소는 포로들에게 음악 활동, 체육 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제공했고 심지어는 노역에 대한 임금도 제공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전쟁 포로, 평화를 말하다’에서 포로수용소가 극한의 이념적 대립의 공간임과 동시에 그곳도 사람이 살던 곳임을 볼 수 있었다.

▲ 엄경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관이 포로수용소 내 자유의 여신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양 옆에 체육 활동과 음악 활동을 하는 포로의 사진이 보인다.
냉전의 연장선, 포로수용소

6.25 전쟁 당시 거제도 인구의 약 절반이 포로였을 정도로 거제도에 많은 포로가 수용됐었다. 이것이 거제도가 아직 포로수용소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일한 곳인 이유이다. 거제도 수용소에는 자유의 여신상이 있었다. 포로들은 그곳에서 이념교육을 강요당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도시모형 만들기, 연극 활동 등을 통해 포로들에게 자본주의라는 사상을 은연중에 심으려는 노력도 있었다.

또한 국군과 유엔군은 포로들에게 재교육이라 불리는 직접적인 이념교육도 진행됐다. 이 때문에 포로들은 교육에 설득당한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 두 집단으로 나뉘게 되었고 이념적 대립이 심화되었다. 실제로 포로들 간에 시위와 싸움은 잦았다. 심지어는 일부 포로들이 반공교육을 반대하며 수용소장인 도드를 납치하기도 하였다. 포로수용소에서조차도 이념 간의 전쟁은 계속된 것이다.

“중립국” 최인훈의 광장에서 포로가 된 명준이 이후 자신의 거취를 정할 때 반복해 외치던 말이다. 포로수용소에서조차 계속되는 극한의 이념적 갈등이 그에게 중립국을 선택하게 한 것이다. 아직도 이런 이념 간의 갈등이 조금은 남아있다.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엄경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연구관은 “아직 끝나지 않는 전쟁이라는 점에서 이번 전시회를 기획하는데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다.”며 “예를 들어 북한에서 포로로 있었던 뒤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을 납치로 적을지 북에 귀화로 적을지 까지 고려해야 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반발이 있을 가능성을 모두 고려해서 전시회를 꾸려야 했다는 것이다.

▲ 포로들은 수용소 관리자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자주 집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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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포로, 평화를 말하다.

거제도 수용소에는 극적인 일화가 있다. 북에서 아들이 군대에 징집되고 열여덟 살의 나이로 포로가 된다. 그 사이 아버지는 남으로 내려와 거제도 포로수용소 문관이 되어 있었고 아버지와 아들은 포로수용소에서 만나게 된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갈등 사이에서 두 개인의 비극적인 만남은 평화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한다.

포로수용소 또한 포로들을 이념 교육의 대상으로만 바라본 것만은 아니다. 이념과는 상관없는 음악과 춤을 가르치고 한글 교육도 진행하였다. 또한 거제도 수용소나 북한의 벽동 수용소는 포로 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다. 우리가 생각하던 포로수용소의 감옥 같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적국의 군인이더라도 근본적으로 포로들을 사람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념적 대립의 상황 속에서도 상대이기 이전에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평화의 출발점이 아닐까.


최강록 수습기자 rkdfhr1234@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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