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대신문
문화
또 다른 푸른 눈의 목격자, 앨버트 테일러와 딜쿠샤 이야기
한승찬 기자  |  hsc7030@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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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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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대신문에서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3.1운동을 취재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쓴 외국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와 그의 집이었던 딜쿠샤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편집자주-

은행나무골 붉은 벽돌집의 주인은 누구인가

서울 종로구 행촌동, 인왕산 산줄기가 이어져 내려와 경사가 진 이 동네에는 임진왜란의 명장 도원수 권율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다. 행촌동(杏村洞)이라는 이름은 이 은행나무의 존재로 인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 은행나무 옆에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귀신이 나오는 집’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던, 폐가에 가까운 붉은 벽돌집이 하나 있다. 사람들은 이 집을 누가 지었는지, 누구의 것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집의 벽 한 편에는 ‘DILKUSHA 1923 PSALM C X X VII. I’ 이라고 적힌 정초석이 있었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몰라 의문을 증폭시켰다. 문화재 및 역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이 집이 단순히 서양식 주택으로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 이상의 논의를 진전시킬 수 없었으며, 대한매일신보의 창립자 중 하나인 어니스트 베델(E. Bethell)의 집이나 대한매일신보의 사옥으로 추측했다.

   
▲ 앨버트 테일러(1875~1948)의 사진.
그러던 중, 미국에 사는 한 노신사가 한국의 역사학자에게 자신이 오래 전 한국에서 살았던 집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역사학자에게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서울 지명을 토대로 집의 위치를 말했다. 추가로 자신의 집 이름이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의미의 딜쿠샤라는 것을 일러 줬다. 결국 2개월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그곳이 행촌동의 오래된 서양식 주택이었음이 밝혀졌다. 은행나무골 붉은 벽돌집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테일러 부부의 한국 생활

식민지 조선의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 노신사의 이름은 브루스 티켈 테일러(Bruce Tickell Taylor)로, 1919년 2월 28일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바로 앨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다.

앨버트 테일러는 1875년 미국 서부의 네바다 주에서 태어났다. 19세기 미국 서부를 휩쓴 금광 채굴 열풍과 무관하지 않게, 앨버트 테일러의 아버지는 일찍이 조선으로 건너와 평안북도 운산의 금광을 경영하고 있었다. 앨버트 테일러는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던 운산 금광의 일을 돕기 위해 1897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 서울역사박물관 전시실에 재현된 딜쿠샤의 정초석. 최근까지 이 정초석은 딜쿠샤에 살고 있던 사람이 쓰던 장독에 가려져 있어 찾을 수 없었다. 딜쿠샤의 이름과 시편 127편 1절을 나타내는 ‘PSALM C X X VII. I’이 적혀 있다.
운산 금광의 감독관으로 지내던 앨버트 테일러는 1905년을 즈음해 아버지로부터 독립했다. 그는 충청남도 천안 인근의 직산 금광을 매입해 운영했는데, 금광 채굴에 필요한 기계를 구입하기 위해 일본으로 출장을 갔다. 그리고 그는 그가 묵은 호텔에서 공연 중이던 연극배우 메리 린리(Mary Linley)를 만나 사귀게 됐고, 1917년 인도 봄베이(뭄바이)에서 결혼했다.

결혼식을 올린 후 테일러 부부는 한국으로 들어와 서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부부는 지금의 서대문구 충정로 인근의 한옥을 신혼집으로 삼고 살았다. 그들은 1923년 딜쿠샤가 지어지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3.1 운동의 함성을 전 세계에 알리다

1919년 2월 말, 부부는 그들의 첫 아이를 낳기 위해 서울의 세브란스병원으로 향했다. 앨버트 테일러의 아내 메리 테일러는 병실 침대에서 누워 있었는데, 병원 안팎의 사람들의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사람들은 분주해 보였으며, 종이 뭉치를 이리저리 전달하거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기고 있었다. 메리 테일러의 침대 속에도 종이 뭉치가 숨겨졌다.

메리 테일러는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다. 간호사는 대한제국의 황제가 승하했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지고 있다고 전해줬고, 한국 사람들이 황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에서 서울로 올라오고 있다고 했다. 한편 앨버트 테일러는 그의 아들이 태어나는 날, 미국 연합 통신(AP통신) 특파원으로서 고종 황제의 장례식을 취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앨버트 테일러는 메리 테일러가 쓰고 있던 침대에서 숨겨둔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한글을 읽을 수 있었던 그는 종이에 써져 있는 내용을 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그것은 바로 기미독립선언서였다. 메리 테일러는 그의 수필집 『호박 목걸이』에서 “당시 갓 신문기자가 된 브루스(앨버트 테일러의 별명)는 아들을 처음 만난 것보다 그 문서를 발견한 것에 더 흥분했다고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 복원공사가 진행되기 이전의 딜쿠샤의 모습. 중앙부의 기둥이 구조적으로 많이 훼손돼 있으며, 건물 곳곳이 많이 변형되거나 훼손돼 있다.
앨버트 테일러는 3.1운동과 기미독립선언서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기사를 송고했다. 일제 당국이 사건에 대한 보도 금지 명령을 내리기 전에 기사를 보내기 위해 곧바로 쓴 기사는 독립선언서와 함께 미국으로 전해졌다. 안전하게 기사를 보내기 위해서 기사가 적힌 종이는 그의 동생의 구두 뒤축에 숨겨졌다. 앨버트 테일러의 기사는 무사히 미국으로 송고돼 <뉴욕 타임즈> 등의 주요 일간지에 보도됐다. 1919년 3월 13일자 <뉴욕 타임즈>에는 그가 송고한 기사를 토대로 3.1운동과 한국인들의 독립선언을 전하는 기사가 실렸다.

3.1운동에 대한 기사뿐만 아니라, 앨버트 테일러는 전국 곳곳에서 일제 당국으로부터 자행된 학살 현장을 취재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 영사와 영국 영사를 대동하고 학살 현장을 직접 찾아가 마을이 불타버리고 시신이 널려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의 취재 덕분에 수원 제암리 학살 사건이 알려질 수 있었다. 그는 이러한 학살 현장에 대해 질의하기 위해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찾아갔다. 앨버트 테일러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총독에게 보여주며 총독이 더 이상의 학살을 중지하라는 명령과 함께 벌어진 사태에 대한 유감 표명을 했다는 것을 보도하겠다고 했다. 총독은 마지못해 그의 의견을 따랐고, 그의 보도가 나간 이후 대학살은 중지됐다.

한국을 사랑했던 외국인, 한국에 묻히다

3.1운동 이후에도 앨버트 테일러는 한국에서 생활을 이어갔다. 테일러 부부는 서울뿐만 아니라 한국 곳곳을 돌아다녔고, 그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그리고 테일러는 금광 사업뿐만 아니라 미국의 물건과 자동차를 수입해 한국에 파는 사업도 했다. 그는 1923년에 위에서 서술한 붉은 벽돌집 ‘딜쿠샤’를 지어 그곳에서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살았다. 딜쿠샤는 중간에 벼락을 맞아 집이 불타기도 했으나, 재건돼 계속해서 테일러 가족의 터전이 됐다.

그러나 1940년대가 지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미국과 일본은 적대적인 관계가 됐다. 일제 당국은 한국에 있는 영국인과 미국인들을 수용소에 감금하거나 가택연금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테일러 가족도 서대문형무소 인근에 위치한 신학교 건물에 감금당했다. 결국 1942년 5월 그들은 일제 당국으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테일러 부부는 약 두 달 간의 여정 끝에 미국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하지만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나게 되면서 일제는 몰락했고, 한국은 일제로부터 해방됐다. 이어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의 군대가 진주하게 됐다. 앨버트 테일러는 한국에서 살았던 경험을 발판으로 미군과 한국인들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자 미국 정부에 건의했으나, 1948년 6월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앨버트 테일러는 죽어서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메리 테일러는 남편의 유언을 따르기 위해 그의 유골을 모시고 한국에 입국했다. 앨버트 테일러는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됐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한국인들의 뜻을 전 세계에 알린 그는 한국에서 영원한 안식을 가지게 됐다.

   
▲ 한창 복원 공사가 진행중인 딜쿠샤의 모습. 올해 안으로 복원이 완료돼 앨버트 테일러와 그의 가족을 주제로 하는 박물관으로 개장할 예정이다.
주인이 떠난 딜쿠샤, 이후에는 어떻게 됐을까

테일러 가족의 은행나무골 붉은 벽돌집 딜쿠샤는 그 이후에 어떻게 됐을까. 테일러 부부가 미국으로 떠난 후 딜쿠샤는 앨버트 테일러의 동생 윌리엄 테일러(William W. Taylor)에 의해 잠시 관리되다 1959년 자유당의 조경규 의원에 의해 매입됐다. 이후 가옥의 일부분이 임대, 매매됐으며 1963년 조경규의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면서 딜쿠샤 또한 국가 소유가 됐다.

하지만 국가는 딜쿠샤를 매입하고 난 다음에 기존에 거주하던 주민들에게 퇴거 조치 등의 법적 조치를 하지 않아 주민들이 계속해서 거주하는 것을 방치했다. 결국 딜쿠샤는 주민들의 불법적인 개조로 인해 그 원형을 상실하게 됐다. 정부가 국유재산에 대한 정확한 파악 없이 딜쿠샤를 방치해 건물의 구조가 계속해서 악화된 것이다.
2015년 진행된 정밀안전진단 결과 ‘긴급보수 시급’에 해당되는 D등급을 받게 됐고 결국 서울시에서는 딜쿠샤를 원형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딜쿠샤는 2019년을 목표로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앨버트 테일러와 그의 가족들을 주제로 하는 하우스 뮤지엄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또다른 푸른 눈의 목격자, 그의 행동이 가지는 의미

지난 2월, 우리 정치권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허위 주장을 신봉하는 일부 세력들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해 광주 시내에서 시민군들을 조종했다는 허위 사실을 믿는 이들은 비논리적인 근거로 사람들을 선동했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찬동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사건 당시의 사진뿐만 아니라 영상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확한 증거가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몇 해 전 개봉한 영화인 ‘택시운전사’(2017)의 모티프가 된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Jurgen Hinzpeter, 1937~2016)의 헌신적인 취재 활동 덕분이었다. 그는 이후 ‘푸른 눈의 목격자’라는 칭호를 얻게 됐다. 누군가에 의해 감춰질 수도 있었던 진실을 들춰내 세상에 알리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는 사례다.

여기 또 다른 푸른 눈의 목격자가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악한 실상을 목숨걸고 취재해 세상에 알리고,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 만방에 전파한 앨버트 테일러의 행동은 일제강점기의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려는 세력에게 경종을 울린다. 그렇기에 그의 행동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글·사진_ 한승찬 기자 hsc7030@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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