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개의 시험관은 전 세계를 뒤집는다!’ 제1회 ‘과학데이’에 등장했던 표어다. 1주일 이상 진행된 이 행사에는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과학강연회와 실험회 등을 관람했다고 한다. 그 중심에는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한 김용관과 발명학회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우리 과학의 발전이 조국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던 김용관. 과학의 불모지나 다름이 없었던 조선에서 과학의 대중화와 자급화를 위한 그의 노력을 따라가 보자.

일본에서 유학하던 김용관은 일본의 근대화가 과학기술의 생활화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선에 돌아와 발명학회를 만든다. 외국의 물건을 쓰면 쓸수록 우리나라가 가난해진다고 생각한 김용관은 우리의 물건을 만들기 위해서 발명을 장려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당시 발명학회의 이념은 과학의 보급이 아닌 발명의 진흥이었다. 당시의 발명학회는 특허 수속 자문을 하거나 어린이 발명가 양산에 노력을 기울였다.

 
발명학회가 커짐에 따라 교육자, 학자, 언론인 등 발명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발명학회가 발명에 국한된 모임이 아닌 당대 지식인들의 모임이 된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옴에 따라 학회의 이념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인사들은 일상생활, 종교, 학문 등 사회생활 전반을 과학적으로 재편하자는 주장을 폈고 이 때문에 발명학회의 이념이 ‘과학의 자급화와 대중화’라는 방향으로 변하게 됐다.
발명학회에서는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과학조선(科學朝鮮)>이라는 잡지를 발행했다. <과학조선>은 과학에 대한 전문적인 기사를 비롯해 화보, 과학상식, 일반인들의 흥미를 끌기 위한 대중적 기사등 다양한 내용을 담았다. 이 잡지의 34년 6월호를 보면 김용관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우리 조선은 과학이라 하면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어려운 학문적 이론처럼 생각하여 과학이 실사회와 거의 절연상태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과학의 황무지가 되었으니 이리하여 우리가 날마다 쓰고 접촉하는 외국의 과학 제품이 조수처럼 들어와서 우리의 주머닛돈을 자꾸 남에게 빼앗기고 있습니다. 나는 과학조선의 전도를 위하여 이 방면에 일하기 쉬지 아니할 것을 여러 동지들에게 호소합니다”

발명학회는 잡지를 발행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대중 집회를 구상했다. 한국 최초의 과학의 날인 ‘과학데이’가 탄생한 것이다. 과학데이는 찰스 다윈의 기일인 4월 19일이었는데 이는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사회진화론의 영향이었다. 1934년 열린 제1회 과학데이 행사는 기업, 사회명사들로부터 큰 호응과 후원을 받았고 언론은 행사를 보도하고 선전했다. 김용관은 행사 3일 전부터 라디오에 출연해 행사를 독려했다. 1주일간 이어진 과학 데이 행사는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렸다. 특히 과학영화상영회에는 8천명의 인파가 몰렸지만 그중 800명밖에 입장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져 주최 측이 급히 시설을 확충해야 할 정도였다. 이외에도 견학 행사, 강연회, 자동차 퍼레이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때 과학 데이 행사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대중의 수를 최소 43만명으로 추산된다.

과학데이 행사는 해를 거듭할수록 성대해졌고 언론의 보도에 힘입어 전국적인 축제가 되어갔다. 하지만 과학데이는 일체 치하에서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일본이 과학데이 행사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봤기 때문이다. 일본이 과학 데이 행사를 제지하기 시작하며 1938년 행사를 준비하던 김용관을 체포했고 과학 데이 행사도 5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발명학회와 김용관은 식민지 조선의 상황에서 과학의 보급을 통해 민족의 살길을 스스로 찾아갔다. 과학의 불모지였던 조선에서 맨손으로 과학의 대중화를 이루어 낸 김용관, 그의 노력이 오늘따라 대단해 보이는 건 그 때문일까.


최강록 기자 rkdfhr1234@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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