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공호, 요즘 학생들에게는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말일 것이다. 사전적 의미로 방공호란 “적의 항공기 공습이나 대포, 미사일 따위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땅속에 파 놓은 굴이나 구덩이”이다. 혹시 우리 대학에도 방공호로 추정되는 시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서울시립대신문> 제661호(2014.4.14.) ‘시립대 X파일’ 기사에서는 1930년대 우리 대학의 전신인 경성농업학교의 강당으로 지어진 자작마루 지하에 지하공간이 있다고 전한다. 이 공간의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공습을 피하기 위한 방공호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방공호가 경성농업학교에만 있었을까?  

세계 전쟁사에서 방공호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그 전까지 전쟁이란 전선에서 벌어지는 전면전을 의미했다. 그러나 1차 대전 시기 과학기술의 발달로 항공기를 이용한 공습이 처음 등장했다. 이것은 곧 전선과 후방의 경계가 희미해짐을 의미했다. 각국은 승전을 위해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적국의 도시를 공습했다. 거꾸로 각국은 공습에 대비해 도시에 방공 시설을 구축해야 했던 것이다.

한반도 도시에 방공 시설이 등장한 것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1940년대 초이다. 1944년 중반 마리아나제도(괌, 사이판 등)가 미군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이 곳을 기지로 폭격기는 일본 본토까지 출격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일제는 한반도에서도 폭격에 대비한 방공호 축조를 서둘렀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서울의 원도심부에서는 심심치 않게 일제말기 축조된 방공호가 발견되곤 한다. 많이 알려진 것만 해도 삼청동, 회현동, 충정로, 경희궁 등지가 있다. 물론 미군의 폭격은 일본 본토에만 집중되었다. 1945년 8.15 때까지 한반도에는 남해안과 북부 지역 일부 외에는 폭격이 없었다. 일제의 강압 속에서 축조한 방공호는 실제 쓰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축조된 방공호는 오래도록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아마도 6.25전쟁기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몸을 숨기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도 주민의 회고에 의하면 회현동의 경우 방공호를 김치 저장고로 사용했다고 하며, 삼청동에서는 여름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더위를 피하곤 했다고 한다.

방공호를 현실에서 사용해야 하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이다. 지금은 물론 그런 시대가 아니다. 앞으로 그런 시대가 되어서도 물론 안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지금 서울 시내 곳곳에 남아있는 방공호들은 우리 현대사가 거쳐온 불행한 시대의 증언자로서, 서울 시민의 생활사의 추억으로서, 나아가 평화시대의 도시유적으로서 기억되어야 하지 않을까?


염복규 교수(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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