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이맘때가 되면 현대사의 아픈 기억 하나가 수면 위로 조심스레 떠 오른다. 71년 전 4월 3일 남로당 무장대의 봉기를 시작으로 아름다운 섬 제주는 비극의 현장으로 급변했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의 남로당 봉기를 거쳐 1954년까지 약 8년 동안 제주도 전역은 양민의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지난 4월 3일, 국무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제주에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희생자 추념식이 있었다.

1948년, 한반도 정국은 좌익과 우익, 양극단으로 찢어졌다. 북한지역을 제외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예고된 가운데 5월 10일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가 예정돼 있었다. 좌익은 이러한 단정, 단선 움직임에 격렬히 반발했다. 총선이 점점 다가오는 가운데 4월 3일, 좌익계열의 남로당이 제주에서 무장봉기를 시도했다. 제주에서 발생한 일련의 소요사태로 5.10 총선거 제주도 선거구 3곳 중 2곳의 선거가 무효화되는 등 제주에서는 혼란이 지속됐다. 이에 대응해 미군정과 막 수립된 정부는 제주에서 발생한 혼란의 진압을 명령했다. 그러나 진압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진압군은 좌익 무장대를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양민을 대상으로 한 학살을 자행했다. 최소 1만에서 8만 5천명에 이르는 제주도민이 바다에 던져지고, 목이 베어지고, 총에 맞아 사망했다.

해방 직후, 제주는 미군정의 강압적인 통치방식에 불만이 누적된 상태였다. 이 가운데 이념, 즉 육지에서의 좌익과 우익의 극단적 대립이 섬으로 흘러 들어갔다. 좌익은 반미 감정이 고조된 제주도민을 선동해 우익 및 미군정과의 대립을 부추겼고 우익은 제주도와 모든 제주도민을 ‘빨간 섬’, ‘좌익세력’으로 규정했다. 제주에 무고한 양민이란 없었다. 무장대에 가입한 좌익이거나 이들을 진압하러 건너온 우익만이 존재했다.

이념대립이 제주 섬을 휩쓸고 간지 71년, 우리는 제주의 비극을 관광한다. 정방폭포와 표선해변 등 이제는 관광지가 되어버린 제주도 전역에는 아직 학살의 흔적이 다 지워지지 않았다. 아직 다 지워지지 않은 이념대립의 상처 위로 남은 것은 무엇인가. 여전히 우리사회에서 양 극단의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이념논리에 희생당한 것은 언제나 무고한 양민, 오늘날의 평범한 삶을 사는 시민들이다. 71년 전, 제주의 4월을 기억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념의 이름 하에 개인이, 가정이 파괴되고 민족과 국토가 둘로 찢겨야 했던 비극의 현대사를 반복할 이유는 더 이상 없다. 오랜 기간 암묵과 금기의 대상이었던 4월의 제주를 추모한다.


성기태 학술부장
gitaeuhjin0330@uos.ac.kr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