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산 김원봉

지난 2월 국가보훈처 산하 지문기구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가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선정할 것을 권고했다. 의결 권고안에는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원봉 등 독립유공자로 평가돼야 할 독립운동가들에게 적정 서훈을 함으로써 국가적 자부심을 고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라고 적시돼있다. 뒤이어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에 대해 3월 26일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이 정무위 전체회의에서 ‘의견을 수렴 중이며 수여 가능성은 있다’고 발언했다. 김원봉의 독립유공자 서훈 수여는 현재 학계, 정계에서 찬반으로 나뉘어 논란의 중심에 있다.

독립운동에 매진했지만 남과 북 모두에게 외면당한 김원봉

김원봉은 1898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했다.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피선됐다. 이후 일제 수탈 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지속했다. 하지만 테러, 암살과 같은 무장투쟁의 한계를 깨닫고 1926년 황푸군관학교 훈련생으로 입교해 조직투쟁의 노선으로 변경했다.

이후 1935년 의열단, 조선혁명당, 대한독립당 등 5개 단체를 규합해 한국민족혁명당을 조직하고, 각 혁명단체에게 단일조직으로의 통합을 제의하며 임시정부와 합작을 시도했다. 1944년 임시정부에 합류해 군무부장에 취임하고 해방 후 임시정부에 남아있으면서 좌우합작을 추진했다. 하지만 남한의 주요 집권층은 중국 공산당에 합류해 독립운동을 했던 김원봉을 공산주의자로 의심했다. 그 후 김원봉은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하며 수모를 겪었다. 1948년 김원봉은 북한에 방문해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이끌던 여운형이 암살당하고 남한만의 총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이 확정되자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학계에선 김원봉이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은 이유가 정치적 동지이던 여운형의 피살, 남한에서 받았던 고문 등 신변의 위협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후 김원봉은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하며 요직을 거쳤으나, 평화통일 운동을 추진하다 1957년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 김원봉의 생가 터에 세워진 밀양의열기념관의 전경이다.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김원봉

김원봉은 독립에 평생을 바쳤고, 해방 후 통일을 이루는 데 매진했다. 김원봉에게 독립 유공자 훈장을 서훈하는 것은 언뜻 보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현재 논란이 되는 ‘독립 유공자 훈장’은 건국훈장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는 독립훈장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독립운동을 건국 과정으로 보기 때문이다. 상훈법에 건국훈장은 “대한민국 건국에 공로가 뚜렷하거나 국가 기초를 공고히 하는 데 공적이 뚜렷한 사람에게 수여한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김원봉은 대한민국 정권 수립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월북 후 제1기 북한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다. 김원봉은 북한에서 장관급 직책인 국가검열상, 노동상을 역임한 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는 등 북한 정권 유지에 기여했다. 즉 김원봉이 건국훈장의 서훈 대상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직책이 권력의 핵심 요직은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정권 수립과 유지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았다고는 보기 힘들다. 또한 상훈법 제8조의 ‘서훈 취소 사유’ 조항 중에는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사람에게는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고 나와있다.

김원봉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 시 월북해 북한에서 요직을 지냈다. 김원봉이 독립을 위해 투쟁했어도 쉽게 건국훈장을 서훈할 수 없는 이유다. 김원봉의 훈장 서훈 문제에 대해서는 국회와 보훈처 주관 학술토론회 등 현재 정계, 학계에서 열띤 논의가 진행 중이다. 유공자 서훈 정당성의 충돌은 이념의 갈등과 대립의 장으로 확대됐다. 이에 국민들의 관심 또한 커지고 있다.

독립 유공자 서훈, 사회 다방면에서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해

국가보훈처는 독립 유공자 1만5180명을 전수 조사해 친일 행위자를 가려낸 뒤 서훈을 취소하고, 좌익 활동 경력이 있는 298명을 재심하기로 했다. 따라서 현재 이념 대립의 장으로 커져버린 ‘김원봉 독립 유공자 서훈’ 논쟁은 정계와 학계 등 다양한 방면에서 사회적 논의를 거친 뒤 결정을 내려야 할 필요성이 있다. 


유진현 수습기자 bbang1@uos.ac.kr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