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옥수수라 굳게 믿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닭들이 자신을 쪼아먹을까봐 공포에 질려있었다. 오랜 정신과 상담 끝에 남자는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을 납득하고 퇴원한다. 그러나 얼마 안가 남자는 혼비백산해서 병원으로 되돌아 왔다. 의사가 놀라서 이유를 묻자 환자는 “닭들이 자꾸 나를 쫓아다닙니다. 무서워 죽겠습니다”라고 답한다. 의사는 차분하게 “선생님은 이제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거 아시잖아요?” 라고 타이른다. 그러자 환자가 대꾸한다. “글쎄, 저야 제가 옥수수가 아니라는 걸 알지요. 그런데 닭들도 그것을 알까요?”

이 시시한 농담을 글의 서두에 제시한 것은 이 농담에 뼈가 있기 때문이다. 타인은 자아를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의 자존감을 결정짓는 데에 타인의 평가가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를 아무리 ‘옥수수’가 아니라고 생각하더라도 주변의 사람들이 그를 ‘옥수수’라 평가한다면 그는 ‘옥수수’가 되거나 아니면 반쯤 미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는데 타인의 인정은 어느 정도 필수불가결한 것처럼 보인다.

타인의 인정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가장 보편적인 것 중 하나는 직업이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은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의 봉급과 사회적 지위는 스스로가 하는 일에 얼마나 만족감을 느끼는 지가 아니라 타인들이 원하는 기대를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기대를 고려해서 진로를 결정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가장 운이 좋은 상황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자신도 원하는 경우다. 대개 권력과 부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직업들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이런 직업들에 종사하기로 결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반면 삼국시대의 매장 풍습을 연구하거나, 구상성단의 공간 분포를 분석하는데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하는 데에는 조금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타인이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심한 경우에는 비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받거나 조금 더 나은 경우에도 냉정한 무관심속에서 인생을 보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 한 켠에는 이러한 삶에 대한 동경이 자리한다. 영화 <라라랜드>의 대사를 빌리자면 이런 삶을 산 이들의 열정이 ‘자신이 잊은 것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순수한 열정’은 사회적 인정이 분배되는 기준을 바꿀 수 있다.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원하는 사회보다 다양한 가치가 존중되는 세상이 더 건강한 사회라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사회에 속한 사람의 수와 사회가 품을 수 있는 꿈의 개수가 같아지기를 기대해본다.


김세훈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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