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대신문
문화서울시립대문화상
<소설 부문 당선작> 터미널
안양예고 김 지 연 作  |  press@uos.ac.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9.10.01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사람들을 가득 실은 거대한 버스가 터미널로 들어선다. 06, 옆면에 커다랗게 숫자가 새겨진 하얀 버스에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다. 그 모습이 꼭 크림이 가득 든 빵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크림 같아 군침이 돌았다. 은주는 달달한 크림이 미어터질 만큼 가득 든 슈크림 빵을 먹고 싶어져 카디건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러나 주머니 속 지갑에는 겨우 서울까지 갈 차비뿐이다. 달고 부드러운 크림이 혀끝에서 몽글몽글하게 부서지는 것을 상상하던 은주가 작게 입맛을 다신다. 막 봄나들이를 다녀오는지 밝은 색 옷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은 발갛게 물든 볼 한가득 웃음을 달고 있다. 은주는 어깨를 움츠리며 제 발끝을 내려다본다. 곳곳에 때가 타고 천이 해진 운동화 코가 까맣게 반질거린다. 시큰거리는 코를 한 번 훌쩍인 은주가 주변을 살피며 카디건을 꼼꼼하게 여민다. 커다란 카디건 탓에 팔 부분이 펄럭였으나 부른 배는 아무리 감추려 해도 티가 났다. 은주는 더욱 몸을 웅크린다. 사람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전부 제 배로 꽂히는 듯하다. 저쪽의 청소부가 제 배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것도 같다. 괜스레 배가 따끔거린다.


별안간 꽤 쌀쌀한 바람이 분다. 눈이 내리듯 꽃잎들이 나부낀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던 사람들이 인상을 찡그리고 옷깃에 붙은 꽃잎을 떨어낸다. 몸을 웅크리고 있던 은주는 발치에 떨어진 꽃잎을 주워든다. 벚꽃이다.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처럼 얇은 꽃잎을 보며 은주는 카디건 주머니 속 손에 쥔 핀을 더욱 꼭 쥔다. 얼마 전 노점상에서 산 핀이다.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그 앞에 너덧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하고 있는 예쁜 꽃핀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계산까지 마친 뒤였다. 은주는 보호소로 돌아가 핀을 손에 쥐고 한참을 숨죽여 웃었다. 그래도 핏줄이라고 챙기냐, 병신 같은 년. 그 뒤로도 몇 번 버리려고 해 보았으나 그때마다 이상하게 배가 욱신거리는 탓에 차마 버릴 수 없었다.
임신일 거란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생리가 불규칙하긴 했으나 심한 다이어트로 인한 호르몬 불균형 탓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이게 말이 돼? 은주는 병원에서 집까지 오는 내내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렇게라도 하면 이 악몽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관계를 가진 것도 두 번 뿐이었다. 두 번, 고작 그 두 번 때문에. 은주는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목구멍 안으로 집어삼켰다. 겁에 질린 얼굴로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던 소년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건 전부 그 개새끼 탓이다. 아니 내 탓인가? 아니 이건 다 너 때문이다. 은주는 부른 배를 내려다보며 원망을 씹어 내뱉는다.


중절 시기는 벌써 지났어요. 여기 팔다리 보이시죠? 심장이랑.의사는 검은 화면 속 흰 덩어리를 가리키며 말했었다. 은주는 꿈을 꾸는 기분으로 손톱만한 세포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쿵, 쿵, 좁은 진료실 안에 심장 뛰는 소리가 울렸다. 은주는 병원을 나서면서도 모든 것이 지독한 악몽일 뿐이라고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은주는 아직도 그때 의사가 그녀를 비웃었다고 믿는다.
사람들을 가득 실은 거대한 버스가 터미널로 들어선다. 경숙은 비질을 멈추고 들어오는 버스를 바라본다. 커다란 감색 버스에서 사람들이 뭉텅이로 쏟아져 내린다. 저 사람들은 이 터미널에 얼마나 머물게 될까. 짧으면 10분, 길어 봐야 한 시간일 것이다. 봄나들이를 다녀오는지 밝은 색 옷을 입은 한 무더기의 사람들은 발갛게 물든 볼 한가득 웃음을 달고 있다. 경숙은 그들을 보며 누군가와 함께 떠났던 여행을 떠올린다. 삶은 계란을 건네며 웃던 표정을. 처음 타 보았던 기차의 의자에서 울리던 진동과 그 따뜻한 손길을.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굳은 말투와 얼굴도. 그때 자기네끼리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관광객들 중 누군가 경숙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경숙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바닥으로 둔다. 언젠가 청소부가 자신들을 관찰하듯 쳐다보는 게 기분 나쁘다며 소리를 지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작업용 비닐장화의 구멍 난 앞코가 터미널 불빛에 반짝인다. 1인당 하나씩 지급되는 유니폼과 앞치마, 장화는 분실되거나 망가지면 회사에 돈을 주고 사야 한다. 발등 부분이 조금 찢어진 것뿐이라 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구멍이 조금씩 더 커졌다. 다시 사는 수밖에 없나. 경숙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공기에서는 아직 차가운 바람 냄새가 났다.불어오는 바람에서 추위가 조금 가시면 사람들은 옷깃에 봄을 매단 채 터미널로 들어선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막 터미널에 들어선 남자가 얇은 점퍼에 붙은 꽃잎을 떼어내고 있다. 경숙은 남자가 떠난 자리로 다가가 그가 털어낸 꽃잎을 조심히 쓸어낸다. 꽃잎, 특히 벚꽃이라던가 라일락, 진달래 같은 봄의 꽃잎들은 약하고 쉽게 짓무르기 때문에 주의해서 쓸지 않으면 딱딱한 빗자루 끝에 잘려 사방에 나뒹굴거나 누군가의 발에 밟혀 바닥에 들러붙기 일쑤다. 꽃잎이 짓무르지 않도록 쓸어낸 경숙이 굽혔던 허리를 폈다.
아까 보았던 사람들은 그새 어디론가 뿔뿔이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꽃구경을 가본 지가 언제였지. 경숙이 희미하게 바람결에 실려 오는 꽃내음을 맡으려 숨을 크게 들이쉰다. 그러다 금세 목이 텁텁해져 마른기침을 몇 번 내뱉는다. 하긴 요즘은 봄이 언제 왔다 가는지도 모를 날씨다. 마스크를 끼고 무심하게 서서 제 옷깃에 달라붙은 봄을 털어내는 사람들의 눈길은 오로지 버스의 출발, 도착시간을 알려주는 전광판에만 고정되어 있다.


버스 도착 시간 안내 전광판 앞에서 두 사람이 얼싸안고 있다. 모녀인가, 경숙은 중년 여자의 손에 들린 커다란 캐리어를 보며 생각한다. 옆의 의자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두 남녀가 머리를 맞대고 손장난을 치는 중이다. 저들은 기다리는 버스가 오면 터미널을 떠날 것이다. 아까 경숙이 보았지만 이제는 뿔뿔이 흩어진 그 사람들처럼. 떠난 자리는 다른 사람이 와서 채우고,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채우겠지. 근데 그뿐이야, 경숙이 중얼거린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또 머문다고 해도 결국 그뿐인 것이다. 밤이 되면 터미널은 텅 비고, 드넓은 광장을 꽉 채우는 반가운 인사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말소리, 간혹 터지는 웃음소리나 다시 보자는 약속 같은 것들도 전부 사라진다. 그럼 경숙만이 텅 빈 터미널에 남아 사람들이 남기고 간 발자국이나 들러붙은 껌자국, 뭉개진 꽃잎 따위를 치운다. 경숙은 문득 저와 터미널이 어딘지 닮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꼭 거쳐 가는 곳이지만 결코 목적지는 될 수 없는 곳. 관계에 있어서 경숙은 터미널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너는 네 인생 살아라 이거지?
손톱만한 세포가 찍힌 사진을 들고 은주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야 여기 학원 앞이야. 어깨를 움츠리고 주변을 살피던 개새끼가 은주의 입을 틀어막고 골목 쪽으로 향했다.
…미안하다.
은주는 목구멍 바깥으로 밀려 나오려는 말들을 꿀꺽 삼켰다. 은주의 눈치를 보던 소년이 말을 이었다.
돈 때문에 그래? 너 알바한 돈 있잖아. 그거 꽤 모았다며.
뭐라고?
은주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돈은 은주가 독립하기 위해 2년 동안 모아온 돈이었다. 내가 얼마나 떠나고 싶어 했는지 알면서, 전부 다 이해한다고 했으면서. 네 미래에 함께하고 싶다고 했을 때 말없이 다정하게 웃어주던 얼굴이 지금 이 앞에 있는 얼굴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야 근데 솔직히 네 잘못도 있잖아. 내가 피임약 잘 먹으라고 했었잖아. 네가 가진 거잖아.
…부모님한테는 말 안 했지? 은주는 그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어찔했다. 골목 바깥의 네온사인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게 네가 저런 걸 낳아서 그렇잖아 이 병신 같은 년아. 개새끼야 어쩌라고 그럼 결혼하지 말던가. 너 때문에 내 청춘은 사라졌어 없어졌어. 너 때문에 쟤 때문에…. 아무리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아도 들려오던 고함소리와 비명 따위가 선명하게 머릿속을 부유했다. 은주는 제 앞에 선 소년을 바라봤다. 어쩌면 세상엔 죄다 개새끼들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다들 인간 가죽을 뒤집어쓰고 사람 흉내를 내는 거지. 왈왈, 왈왈 하고…. 입술을 꽉 깨문 은주가 들고 있던 것들을 죄다 제 앞에 있는 이에게 던졌다. 개새끼야 잘 먹고 잘 살아라. 개새끼는 맞으면서도 자꾸만 은주의 얼굴을 살폈다. 은주는 때리면서도 울음이 터질 것마냥 가슴이 시큰거렸다. 그냥 죽어, 어? 죽어. 은주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개새끼가 은주의 손목을 잡아챘다.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된 은주의 얼굴을 보다가 입을 몇 번 달싹였다. 은주의 손을 잡고 있는 건 자신인데도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은주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극악무도한 살인자가 된 듯한 기분으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물거리던 개새끼가 반쯤 씹힌 말을 내뱉었다.


앞으로 …락 하지 마.
제대로 된 문장을 듣지는 못했으나 무슨 뜻인지 정도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재빨리 제 할 말만 뱉어놓은 놈은 제풀에 화들짝 놀라더니 은주의 팔을 내팽개치다시피 놓고 몸을 일으켰다.
…간, 간다.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주저앉은 은주를 두고 개새끼는 도망치듯 학원으로 향했다. 은주는 몇 번 코를 훌쩍이고는 바닥에 떨어진 사진을 주워들었다. 손톱만한 세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은주의 뱃속에서 숨 쉬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악마의 사진이었다. 병신 같은 년. 사진을 잘 접어 주머니에 넣으면서 은주가 중얼거렸다.
반 년 정도는 가출청소년 임시보호소에 있었다. 집에서 버스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굳이 애매한 거리를 택한 건 누군가 찾아주기를 바랐던 마음에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무도 김은주라는 사람 있느냐며 보호소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고, 은주는 텅 빈 알림창이 두려워 휴대폰을 켜지 못했다. 보호소에 있을 때는 매일이 불편했다. 누워 있자니 눈치가 보였고, 일을 하자니 보호소의 관리자들이 자꾸만 다른 아이들에게 눈치를 주는 것이다. 몇몇 아이들은 은주의 배를 보며 낄낄거리거나 좋았냐며 어깨를 세게 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은주는 말없이 이불 속에 웅크리고 앉아 이를 악물고 배에 복대를 감았다. 배가 꽉 조여들수록 살아있다는 기분이 드는 동시에 부풀어 오른 아랫배를 도려내고 어딘가로 멀리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임시보호소에 계속 있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어린 여학생, 그것도 임신한 여학생에게 흔쾌히 일자리를 주는 곳도 없었다. 때마침 은주는 인터넷 미혼모 카페에서 서울에 있는 한 고아원 이야기를 발견했다. 버려진 아이를 주워다 해외로 입양을 보내준다는 고아원이었다. 젊은 미혼모들 사이에는 홀로 아이를 키우겠다며 일자리를 구하는 이들도 많았으나 대부분이 은주처럼 예상치 못한 생명에 당황하거나 도망치고 싶어 했다. 그중에서도 낳은 아이를 다른 곳에 맡기고 떠나는 이들도 많았다. 은주는 공용 컴퓨터의 마우스를 몇 번 딸각거리다 검색창에 그 고아원의 이름을 검색했다. ‘봄꽃 보호소, 사랑으로 아이들을 돌봅니다.’ 서울에 있는 고아원은 규모도 크고 시설도 좋아 보였다. 홈페이지 화면의 크게 웃고 있는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은주는 자꾸만 기분이 이상해졌다. 저 아이들과 자신의 나이가 많이 차이 나는 것도 아닌데. 은주는 제 아랫배를 천천히 쓰다듬다가 화들짝 놀랐다. 제 안에 있는 것이 저 아이들과 똑같은 생명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은주는 누군가 곁에 있는지 살펴본 다음 얼른 검색기록을 지웠다. 그날로 은주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애초에 집에서 떠날 때 챙겨온 몇 안 되는 옷가지도 부풀어 오른 배에는 맞지 않아 입지 못했으니 챙길 것도 지갑과 보호소에서 임시로 받은 연결되지 않은 휴대폰, 그곳에서 받아 입던 옷뿐이었다. 그동안 먹고 자던 것들이 신경 쓰여 은주는 새벽에 나설 때, 서울로 향할 차비를 제외한 여비를 전부 보호소장 책상 위에 두고 나왔다. 그래 봐야 겨우 이십만 원 남짓이었으나 가벼워진 지갑만큼 은주의 마음도 가벼워졌다.


경숙의 첫 기억은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어머니의 등 뒤에 매달려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던 것이다. 홀로 경숙을 키우며 살던 어머니는 미군 부대에서 물건을 떼어다가 시장에 내다 파는 일을 했다. 두 번째 기억은 아무도 없는 집안에 홀로 있고 싶지 않아 밖으로 나돌며 친구들을 만나던 기억이다. 경숙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어머니는 경숙을 집에 떼어놓고 시장으로 향했다. 이제는 어떤 얼굴로 웃었는지, 무슨 냄새가 났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는 홀로 집을 보아야 하는 경숙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또래들보다 많은 금액의 용돈을 놓아두고 해가 다 지고 나서야 집에 돌아오곤 했다. 경숙은 어릴 때부터 친구들을 데리고 돈을 쓰며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만화방에 갔고, 문구점에 갔다. 경숙이 방과 후에 당당한 얼굴로 뒷주머니를 두드릴 때면 친구들은 와아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해질녘이 되면 다들 집으로 향했고 경숙은 점점 외로워졌다. 어쩌면 첫 단추부터 잘못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경숙은 열 번째 애인과 헤어진 뒤 멍하니 앉아 생각했다.


경숙이 중학생이 되고 나서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졌다. 여느 때처럼 새벽같이 봇짐을 싸 문턱을 넘어가던 어머니는 그대로 쓰러져 눈을 뜨지 못했다. 경숙은 상복을 입고 식장에 앉아 눈을 껌벅였다. 친척들이 집은 누가, 아이는 누가, 패물은 누가, 하며 번갈아 서로의 이름을 호명했다. 경숙은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어머니가 있을 것 같았고, 아침에 교복을 입고 나오면 탁상 위에 그날 쓸 용돈이 올려져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경숙이 이별을 받아들일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친척들은 날을 숨긴 칼처럼 경숙을 대했다. 잠깐 한눈을 팔았더니 집이 사라졌고, 어머니의 옷장이 사라졌고, 침대가, 살림살이가 사라졌다. 챙길 것을 다 챙긴 친척들은 쉽게 등을 돌리고 떠났다. 경숙은 큰이모네 집에 맡겨졌다. 숙식이 제공되었으나 그뿐이었다. 교복을 물려 입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등학교는 야간으로 다니면서 경숙은 자연히 눈치가 빨라졌고 말수는 줄어들었다. 친구를 사귈 시간조차 없었다. 경숙은 음식점에서, 세탁소에서, 옷가게에서 일했고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독립했다.


독립한 뒤부터 경숙은 사람을 만나고 다니기 시작했다. 내 사람. 나만 보고, 나를 믿고, 나와 함께하며 나를 배신하지 않을 사람. 경숙은 공백 없이 사람을 만나고 또 만났으나 가슴 속 어딘가가 벌어져 휑하니 바람이 부는 것 같은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럴수록 경숙은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선물을 사다 안겨주고, 아무리 오래 곁에 있어도 외로웠다. 경숙의 어리거나 나이가 많은 연인들은 전부 같은 말을 하며 떠났다.
너한테서는 벽 같은 게 느껴져.


경숙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을 때면 점점 더 말수가 줄었다. 경숙의 내밀한 부분,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과 텅 빈 가슴 속을 들키면 금방이라도 떠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경숙이 완벽한 연인이 되려고 노력할수록 연인들은 쉽게 지치고 더 빨리 경숙을 떠났다. 그럴 때 경숙은 새벽마다 변기를 붙들고 토악질을 하거나 닥치는 대로 먹을거리를 위장 안에 밀어 넣었다. 외롭고 괴로운 밤들이었다.


새로운 길을 찾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건 이십 대가 끝나갈 때 즈음이었다. 야간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여자, 그것도 이십 대의 끝자락에 선 여자가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경숙은 곧장 출장 청소 일에 뛰어들었다. 첫 출근 때는 적응은커녕 그 누구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이가 없어 눈칫밥을 먹으며 일을 해야 했다. 사람들 틈에 섞여서 행동을 따라하다 보니 밥을 먹는 시간도 자꾸만 놓치기 일쑤였다. 경숙은 자주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바닥을 닦았다. 경숙보다 적어도 열댓 살은 많아 보이는 이들은 저들만의 네트워크 같은 것을 끈끈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출근해서 퇴근하기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날도 있었다. 그리고 출장 청소업체에서 호텔 청소로, 지하철 청소부에서 다시 터미널로 일자리가 바뀌고 경숙의 나이 앞자리수도 2에서 3으로, 3에서 4로 바뀌었다. 경숙은 어느새 사십 대 중반에 일터에서 가장 고참이 되어 있었다. 경숙은 자신이 껍데기가 되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하루는 신참으로 들어온 청소부 하나가 탈의실에서 경숙에게 말을 걸어왔다. 50대 주부로, 생활비를 벌기 위해 뛰어들었다고 했다. 경숙의 옆 캐비닛을 쓰던 그녀는 유니폼으로 나눠주는 청소용 앞치마를 내밀었다.
이거 혹시 어디서 바꿔 달라 그래요?
그거요? 어디 봐요.
경숙이 앞치마 가까이로 고개를 숙였다. 앞치마 끄트머리가 손바닥 너비만큼 찢어져 있었다.…이 정도는 그냥 꿰매 입으면 돼요. 이리 줘 봐요.
경숙은 가방을 뒤져 항상 가지고 다니는 작은 반짇고리를 꺼내 그 자리에서 찢어진 부분을 꿰매주었다. 자신을 박씨라고 소개한 그녀는 멀뚱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경숙이 유니폼을 건네주며 당부했다.
이거 바꾸는 게 아니라 돈 주고 사야 돼요. 이것도 다 회사 비품이라. 다음부턴 조심하고, 웬만하면 그냥 꿰매 입어요.
박씨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경숙 씨 무섭다던데, 상냥하네요. 경숙 씨 남편은 뭐 해요?
…저 혼자 살아요.


아. 박씨가 조용히 입을 벌렸다. 경숙은 탁 소리가 나도록 캐비닛을 닫았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유니폼 매무새를 정리했다. 박씨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더 말하지 않았다. 마흔이 넘은 뒤로 가족이 없다고 이야기하면 항상 이런 식이다. 경숙도 제게로 향하는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동정하는 것 같기도 한 시선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빠르게 끼니를 때우는 소독약 냄새가 나는 비품실에서도, 옷을 갈아입는 탈의실에서도 경숙은 다른 청소부들의 대화에 끼지 못했다.
사람들은 전부 떠나고, 그들이 머물렀던 흔적은 오직 터미널만이 기억한다. 경숙은 터미널의 바닥에 남은 껌을 떼어내며 문득 2년 전, 마지막으로 경숙을 떠난 애인을 떠올렸다. 경숙이 생전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해돋이를 보러 여행을 간 것도 그 애인과 함께였다. 그 여행에서 그는 경숙을 떠났던 무수히 많은 연인들과 같은 말을 남기고 떠났다.


항상 사람들이 널 떠난다고 했지. 이제 알겠어. 애초에 네가 그 사람들한테 있을 자리를 내주질 않았던 거야.
경숙은 뒤돌아서 가는 애인을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울었다. 다들 경숙만 내버려두고 떠나고 있었다. 어머니도, 연인들도 전부 자신을 떠났다. 모두와 멀어지고 있었다. 그날 밤 경숙은 눈물 안에 모든 것을 녹여 흘려보냈다. 안에 있는 것을 전부 뱉어내듯 울고 난 뒤부터는 더 이상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부터였다. 경숙은 더 이상 영원히 자신과 함께해줄 누군가를 찾기 위해 애쓰지도, 살아나가기 위해 안달내지도 않기로 했다. 삶에 힘을 쏟지 않기로 결심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쩌면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속이는 게 뭐 어때서? 경숙은 자문했다. 이대로 살다가 가면 아무도 날 기억하지 못하겠지. 경숙은 껌자국을 떼어내다 말고 텅 빈 터미널을 오래 바라보았다.
급작스런 통증에 은주가 허리를 숙인다. 터미널 천장에 달린 전광판에서 360번 15분 후 도착, 이라는 글자가 깜박인다. 은주가 타야 하는 버스다. 은주는 숨을 멈췄다가 가쁘게 몰아쉰다. 이럴 리가 없다. 이러면 안 된다. 아직 예정일은 이주하고도 3일이나 남아 있다. 뒤질 수 있는 건 모조리 뒤져봤다. 인터넷에 나온 모든 정보를 읽었다고 은주는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간신히 막아 두었던 둑이 터지듯 순식간에 두려움이 은주를 잠식한다. 은주는 떨며 겨우 몸을 일으킨다. 바쁘게 걷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은주를 스쳐간다. 그럼에도 모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흘긋 바라본 의자 위에 검붉은 얼룩이 진 것 같기도 하다. 내 잘못이 아냐. 은주는 겨우 카디건으로 배를 감싸 안고 화장실로 뛰듯이 걷는다. 걷는 내내 뱃속에서는 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다. 마침내 화장실에 다다랐을 때, 뜨거운 무언가가 은주의 다리를 타고 흐른다. 뜨거운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하도 이를 악문 탓에 입술이 전부 터져 비릿한 냄새가 난다. 아니, 비릿한 냄새는 밑에서도 난다. 은주는 그 냄새가 어디서 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어쨌든 내 잘못은 아냐, 은주가 생각한다. 쏟아지듯 화장실 제일 끝 칸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끔찍한 고통이 온몸을 휘감는다. 은주는 떨리는 손으로 배를 동여맸던 복대를 풀어낸다. 겨우겨우 변기 위에 그걸 깔고 자리를 잡은 은주는 두려움과 분노에 다리를 떤다. 몸을 떤다. 뜨끈한 것이 쏟아져 나온다. 은주는 다시금 세게 이를 악문다.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을 수 없어 카디건 팔을 빼내 그걸 뭉쳐 이빨 사이에 끼워 넣는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빨이 나가거나 어디 한 군데 살점이 떨어졌으리라. 은주는 이를 악물고 힘을 준다. 목울대 너머로 뜨거운 것이 울컥거렸다. 원망, 혹은 분노 어쩌면 욕지거리…. 은주는 눈을 감고 속으로 끝없이 되새긴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내 잘못이 아냐. 밑이 찢어질 것 같다. 사람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은주는 바짝 굳어 몸을 웅크린다. 거대한 통증이 그녀를 덮친다. 누군가 나를 발견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은주를 막 화장실에 들어온 어떤 여자가 발견한다. 구급차를 부르고,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가운데 실려 나간다. 깜박거리는 화장실 천장의 전등을 바라보며 상상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곧 화장실이 잠잠해졌다. 은주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화장실의 좁고 낮은 천장을 바라보기를 반복한다. 점점 감각이 사라진다. 단단하게 뭉쳤던 근육이 서서히 벌어지기 시작한다. 무언가가 나오기 시작한다. 은주는 그것이 제 몸에서 빠져나가는 걸 느낀다. 동그랗고 축축한 머리통을 더듬어 본다. 다시 끔찍한 고통이 시작된다.


팔과 다리까지 토하듯 뱉어내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은주는 정신을 차린다. 붉고 끈적한 것을 온통 뒤집어쓴 아이는 눈도 뜨지 못한 채 작고 쭈글쭈글한 팔을 허공에 휘젓고 있다. 끔찍하게 못생겼다. 아이라기보다는 쭈글쭈글한 살덩어리에 가까운 것이 작게 칭얼거린다. 여자아이다. 은주는 그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축축하게 젖은 카디건 소매를 뱉어낸다. 언뜻 피냄새가 나지만 그게 아이에게서 나는 냄새인지, 저 자신이 풍기는 냄새인지 알 수 없다. 은주는 흐느낌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면서 휴지를 뜯어 다리를 닦아낸다. 얼굴의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을 닦아낸다. 아이가 울기 시작한다. 불현듯 은주는 놀라 아이를 바라본다. 누군가 올지도 모른다. 벌겋고 주름진 얼굴을 하고 아이가 운다. 두렵다. 공포스럽다. 울음이 꼭 원망 같다. 욕설 같았다. 질책 같은 울음을 뒤로 한 채 은주가 화장실 밖으로 도망치듯 뛰쳐나간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비질을 하던 청소부와 얼핏 눈이 마주친 것도 같다. 내 잘못이 아니라니까? 은주는 걸음을 더욱더 재촉한다. 빠른 걸음 탓에 카디건이 빠르게 펄럭인다. 뭔가 툭 떨어지는 것도 같다. 누군가 은주를 붙잡는 것 같았으나 멈추지 않고 뛰다시피 절뚝거린다. 은주는 겨우 터미널 문을 찾아 밖으로 뛰쳐나간다.


갓 스물은 되었을까 싶은 앳된 얼굴의 여자가 희게 질린 얼굴로 화장실에서 뛰쳐나온다. 여자는 어두운 곤색의 커다란 카디건에 진녹색 체크무늬 남방을 껴입었는데, 옷의 부피는 큰 반면 팔목과 발목이 가늘어서 꼭 펄럭이는 종이인형 같다. 터미널에선 뛰면 안 되는데. 여자를 말릴 요량으로 경숙이 입을 열었으나 여자는 주변을 살필 정신도 없는 것 같았다.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하다. 경숙이 범죄자가 있나 싶어 주변을 휘 둘러보는 사이 곤색 카디건 자락이 터미널의 널찍한 유리문 너머로 사라진다.
저기, 이거 흘리고 갔는데…!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놓인 벚꽃 모양의 핀이 조명에 반짝인다. 경숙이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어 든다. 플라스틱 똑딱이 핀에 역시 플라스틱으로 된 벚꽃 장식을 풀로 붙인 조잡한 머리핀이다. 아주 조그만 게 꼭 애들 머리핀 같은데. 경숙은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핀을 똑딱거렸다. 달칵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귀에 꽂힌다.
아줌마! 이리 좀 와 봐요!
저 쪽에서 한 여자가 경숙을 부른다. 화장실 앞에 사람들이 잔뜩 몰려 있다. 경숙은 앞치마 주머니에 핀을 급하게 욱여넣고 화장실을 향해 뛰어간다. 여자화장실이다. 그 앞에 옹기종기 모인 이들은 저마다 수군거리거나 작은 소리로 짜증을 내고 있다.
아니, 경찰을 부르자니까요?
거 빨리빨리 좀 합시다!


매섭게 오가는 말들 속에서 경숙은 어렴풋하게 생명의 소리를 듣는다. 잠시만요, 잠깐만요.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는 건 화장실 제일 끝 칸이다. 경숙이 가까워질수록 울음소리도 점점 커진다. 이윽고 경숙이 천천히 화장실의 문을 연다. 조심스럽게 열린 문 너머로 불그스레한 무언가가 보인다. 화장실 변기 커버 위에 놓인 그것은 자지러질 듯 울어댄다. 경숙은 놀라 헛숨을 삼킨다. 아이는 찍찍이가 붙은 복대 위에 덩그러니 낳아져 있다. 복대는 온통 핏물과 양수 따위에 젖어 본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 수 없다. 탯줄을 고스란히 매단 아이는 비릿하고 끈적거리는 액체를 뒤집어쓴 채 시뻘건 얼굴로 열심히 악을 쓴다. 그리고는 경숙이 가까이 다가가자 붉고 주름진 손가락으로 경숙의 앞치마를 꽉 쥐고 놓지 않는다. 경숙은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떠올리려 최선을 다한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몸을 더듬어보는 경숙의 손에 앞치마의 튀어나온 부분이 걸린다. 경숙은 벚꽃 모양의 핀을 꺼내든다. 그리고는 아까 자신이 쓸어냈던 꽃잎을 떠올린다.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짓무를 것만 같은 아이는 도무지 쓸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우는 아이를 바라보던 경숙이 벚꽃 핀을 꺼내 들고 천천히 흔든다. 어떻게든 울음을 달래보려는 시도다. 아이는 작은 손으로 핀을 움켜쥔다.


그래. 괜찮아, 괜찮아…….
경숙은 떨리는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약한 꽃잎 같은 아이의 볼이 부드럽게 떨린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발간 얼굴을 보던 경숙은 제가 나왔을 순간을 떠올린다. 어머니는 자신을 낳으며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어머니에게 안겼을 때 들려오던 심장 소리 같은 것들을 생각한다. 따뜻하다, 경숙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조그만 살덩어리에 불과한 아이는 눈과 코와 입이 전부 있었고 따뜻했다. 이 애도 자라면 어딘가로 향하겠지. 목적지를 향해 수많은 사람들을 거쳐가겠지. 아이는 제가 이 세상에 살아 있노라 알리기라도 하듯 경숙이 쥐어준 핀을 움켜쥐고 화장실이 떠나가라 울음을 터트린다. 경숙이 아이를 안아 올리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아이가 좀 더 가까이 몸을 붙이려는 듯 꾸물거린다. 경숙이 어색하게 아이를 받쳐든 손을 조금 더 안정적인 자세로 바꾼다. 아이는 여전히 따뜻하다.


경숙이 아이를 복대채로 안고 나가자마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문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몇몇 수군거림이 적막을 비집고 튀어나온다. 휴대폰 카메라부터 불쑥 내미는 사람도 있다. 개중 누군가 목소리를 높인다.
아 어쨌든 빨리 좀 치워 봐요. 화장실을 못 쓰잖아.
경숙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경숙과 아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무심하게 옷깃을 털어내던 이들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경숙은 그들과 자신 사이에 커다란 벽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영원히 함께할 사람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는 조금 얌전해져 경숙의 품 안에서 색색 숨을 내쉰다.
은주는 다시 터미널로 돌아온다. 손이 덜덜 떨린다. 다시 돌아가서 뭘 어떻게 할 건데? 모르겠다. 그 주름지고 벌건, 주먹만한 얼굴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으나 그대로 가면 안 될 것만 같다. 은주는 터미널 한가운데에 있는 기둥 뒤에 숨어 자신이 뛰쳐나온 화장실을 훔쳐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잔뜩 모여 수군거리고, 이윽고 중년 여성이 걸어 나온다. 작은 핏덩이가 제가 하고 있던 복대에 싸여 품에 안겨 있다. 은주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우욱 하고 구역질을 한다. 그러면서도 눈을 뗄 수 없다. 여자는 터미널 한가운데 서서 움직이지 않는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여자가 천천히 걸음을 뗀다. 은주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터미널 입구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막 들어온다. 바쁘게 걷는 사람들 사이로 꽃잎이 흩날린다. 수많은 사람들이 은주의 곁을 스쳐지나간다. 터미널은 사람들로 채워지고 비기를 반복한다. 은주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잔뜩 힘을 준 다리가 떨린다. 조금씩 걸음을 옮겨 터미널 바깥으로 향한다. 그러다 문득 제 주머니를 더듬는다. 핀이 없다. 아마 다시는 그 핀을 손에 쥐는 일이 없을 거라고, 은주는 생각한다.
경숙은 말없이 사람들을 지나쳐 밖으로 나온다. 아이를 안은 채 우두커니 서서 고개를 들고 터미널을 바라본다. 터미널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는 이들을 받고, 또 보내고 있다. 경숙은 사람들의 발치를 나뒹구는 꽃잎을 쓸어내기 위해 빗자루를 다시 집어들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별안간 아이가 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경숙은 당황스런 얼굴로 아이를 달랜다. 어리숙하고 서툰 손길로 아이를 천천히 흔들던 경숙의 머릿속에 애인의 말이 떠오른다.


애초에 네가 그 사람들한테 있을 자리를 내주질 않았던 거야.
경숙은 주름진 얼굴을 잔뜩 구기고 우렁차게 우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아까와는 또 다른 사람들이 다시 우르르 몰려온다. 우두커니 서 있는 경숙의 곁을 분주한 걸음으로 지나친다.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어디를 가길래 저렇게 바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것일까. 경숙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서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목적지를 알리는 전광판의 불빛이 깜박거린다. 경숙은 아이를 떠받친 손에 단단하게 힘을 준다. 아이의 작고 포동포동한 주먹 사이로 분홍빛 핀이 비죽 솟아 있다. 저 멀리서 버스가 온다.경숙도 아이도, 아직 터미널에 서 있다.

<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관련기사]

안양예고 김 지 연 作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인기기사 
1
조형관 추락사고 발생… 학생 1명 중태
2
누리의 하루 일과
3
“공연예술계 노동자는 상품이 아냐”
4
누리의 ‘견생’ 이야기
5
예정된 사고, 공연예술계의 비극
6
신규 교내와이파이, 정식 개설돼
7
아트 인 시네마
8
시대 알리미
9
책과 사람이 만나는 곳, 파주출판도시를 거닐다
10
책으로 엮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사진기사 
학내 의제 발굴을 위한 캠퍼스 위원회 출범

학내 의제 발굴을 위한 캠퍼스 위원회 출범

지난 10일, 캠퍼스위원회 위촉식이 대학본부 7층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
신문사소개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130-743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서울시립대로 163 미디어관 3층 대학신문사
휴대전화 : 010-2509-4012(편집국장)  |  전화 : 02-6490-2494  |  FAX : 02-6490-2492
Copyright © 2013 서울시립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uo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