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효(경제 19)


“바람 불면 쓰러지고. 비가 오면 그냥 맞고. 참고 참는 우리 인생. 한 줄기 빛을 내려주오. 우리에게 볕이 들면 언 발이 사르르 녹아져, 맨발로 땅을 다져가며 그대의 길을 따르리.”
“새길을 찾아가리, 두 손을 잡고. 백성과 함께 가리, 두 손을 잡고.”

지난 주말이었다. 뮤지컬 세종 1446이 무대에 올랐고, 친구와 함께, 별다른 생각 없이, 늘 그랬듯. 공연을 보러 움직였다. 크나큰 기대는 없었다. 공연이 자그마치 2시간 45분이라는 데 좀 놀라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기대보다 조금 좋았다. 한복을 잘 따온 의상도 제법 예뻤고, 곡도 썩 마음에 들었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만히, 천천히 빠져들었다. 사실은, 정말로 좋았다. 마지막 노래는 이레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위에 대뜸 끄적여 놓은 저 글귀가 그 머리 부분이다. 백성은 고된 삶에 빛을 내려준 왕을 따르고, 왕은 백성과 손을 잡고 나아가겠다 약속한다.

천천히 가사를 곱씹다 보니 문득 어느 기사가 떠올랐다. 그를 읽은 것도 한글날 즈음이었다. 요즈음의 우리말 사용 실태를 보면 세종대왕이 땅을 치며 슬퍼할 것이라는, 대강 그런 내용의 기사였던 것 같다. 예전의 나는 그 기사가 우습다고 생각했다. 세종대왕은 소리를 적어낼 글자를 만든 것이지, 맞춤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고. 나는,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보니 내가 꼭 맞는 생각을 한 것 같지도 않다.

어쩌면 세종은, 지금의 ‘백성들’을 보고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까. 그들의 말을 보고 힘들어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자는 소리를 잘 나타내고 있지만, 그 글이 ‘어린 백성이 니르고져 입에 담았던’ 우리의 말을 앗고 있으니. 글자 본래의 의도와 멀어져, 우리의 가진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모습에,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시절 백성의 소리를 담고자 했던 스물여덟 자는, 지금에 와 처음의 그 아름다운 울림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한글날에나 떠들썩하게, 그러나 간신히 들춰 보는 우리말은 얼마나 많이 스러져 가고 있는가.

”나랏 말이 중국과 달라 백성의 소리를 담아 스물여덟 자 만드니,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 하여 훈민정음이라 하노라.“

어느 교수님이 강의 중 말씀하셨다. 순우리말만 사용하는 것도, 외래어가 순우리말을 죄다 잡아먹는 것도 바라지 않으신다고. 오롯이 그 단어만이 표현할 수 있는 느낌이라는 것도 있으니. 나는 그 말에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글은. 그 뜻을 잘 전할 수 있는 것으로 그저 좋으리라. 백성의 뜻을 실어 펴는 데 어려움이 없으면 족하리라.

세종은 그런 뜻으로, 백성이 저의 소리를 잘 담을 수 있는 글자를 만들고자 했을 것이고, 그것은 어린 백성들에게 힘이며 빛이 되었을 것이고. 나는 백성이었던 이들의 한 사람으로 그와 손을 잡고 나아갈 것이다. 새길은 옛날의 그것에 갇히지 않았으나, 본래 우리가 가졌던 것을 전부 몰아내는 길도 아니리라.
바른 소리에 백성의 마음을 담아. 나아갈 새길.


가사는 전부 HJ컬쳐 뮤지컬 세종 1446의 OST ‘그대의 길을 따르리’에서 가져옴(‘녹아져’ 등 시적 허용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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