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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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체전, 세기를 넘어서다
손용원 기자  |  ywson51@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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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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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체전으로 보는 우리의 역사

올해 ‘전국체전’이 100회째를 맞이했다. 대한체육회와 서울특별시는 100년의 상징성을 기리고 앞으로의 역사를 새로 쓰기 위해 38년 만에 서울에서 다시 전국체전을 유치했다. 서울에 낙후된 시설을 재정비해 체육 인프라를 구축함으로써 세계 스포츠 중심 도시로의 재도약을 준비하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올해 전국체전은 10월 4일 개최돼 7일간 약 72개의 경기장에서 진행됐다. 일반부, 고등부, 대학부에서 총 3만여 명이 참가했다. 총 47개의 종목에서 서울 선수단이 24년 만인 올해 종합우승을 거머쥐었다.

전국체육대회 명칭은 일정하지 않았다.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회가 창설된 후의 첫 행사로 그해 11월에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개최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기원이다. 대회 종목을 점점 종합 종목으로 넓혀나가 오늘날 전국체전으로 발전했다. 체육대회가 종합경기대회의 형태로 시작된 것은 1925년부터다. 경성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이 세워지고, ‘조선 신관경기대회’가 마련됐다. 일본인에 의해 대회가 개최됐으며, 일본 선수가 참가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주도한 종합체육대회의 시작은 1934년 개최된 ‘전조선종합경기대회’이다. 하지만 일본의 탄압으로 1938년 조선체육회가 강제 해산당하고 제18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됐다. 그 후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전국체육대회는 다시 시작됐다. 그해 11월 조선체육대회가 부활하고 곧이어 12월에 자유해방을 경축하는 종합경기대회로 제26회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제29회 전국체육대회가 열렸다. 이때부터 조선종합 경기대회 또는 조선올림픽대회 등의 대회 명칭을 ‘전국체육대회’로 통일하고 이제까지의 자유 참가제도를 시·도 대항 제도로 바꿨다. 이후 1950년 6·25 전쟁 때 한번을 제외하고 그 이후로 매년 개최되고 있다.

전국체육대회로 보는 스포츠의 의미

“올림픽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참가이다. 마찬가지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노력이다” 근대 올림픽을 창시한 피에르 그 쿠베르탱 남작의 말이다. 이러한 스포츠의 의미는 전국체전에도 적용된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 우리는 일본에 스포츠로 승리하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줬다.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독립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항일운동의 정신적인 원동력이 됐다. 3년의 6·25 전쟁을 겪으면서도 전국체육대회는 한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열렸다.

이처럼 전국체육대회는 암울했던 시기를 견뎌내는 힘이 됐고 우리나라 민족들을 하나로 결속시켜줬다. 세계화에 따른 다양한 스포츠의 정립은 국가 간 장벽을 허물고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매개체로 자리 잡았다. 현대 사회에서 스포츠는 건강과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즐거움 주고 있다. 일반인은 취미로 동호회나 강습을 통해 직접 즐기기도 한다. 이에 본지는 전국체전에서 생소한 스포츠를 직접 관람하여 그 현장을 담아 봤다.

기자는 올해 서울에서 100회째를 맞이한 전국체육대회를 다녀왔다. 사람들에게 생소할 수 있는 종목과 서울에서 관람할 수 있는 종목을 선정해 3일 동안 5곳을 다녀왔다.  -편집자주-

핸드볼 하늘을 가르는 작은 공

   
▲ 한승빈 선수가 날아올라 슛을 던지고 있다.

창의적인 패스와 빠른 돌파로 상대 수비수들 벗겨 내고 강한 슛으로 골망을 흔든다. 재빠른 가로채기는 역습으로 이어진다. 핸드볼 경기는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긴장감 넘치게 진행됐다. 결승전이다 보니까 각 두 지역 간 응원전도 치열했는데 지역마다 응원봉의 색깔을 맞추고 북과 장구로 응원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공을 드리블하는 것은 농구와 유사한데 볼을 가지고 4보 이상 이동하거나 4초 이상 가지고 있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다. 가벼운 반칙을 범했을 때는 반칙을 한 지점이나 그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골라인 밖에서 자유투가 주어진다. 또 심한 반칙을 하면 축구의 페널티 킥과 같이 페널티 스로(Penalty throw)가 주어진다.

핸드볼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작됐는데 당시에는 깃털을 채운 가죽 주머니를 여러 사람이 서로 빼앗아서 정해진 장소에 던져 넣는 경기였다. 지금의 핸드볼의 형태가 갖추어진 것은 독일에서 1915년 무렵부터 여성의 구기 종목인 ‘토어발’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 뒤 미국·체코슬로바키아·벨기에 등 여러 나라에 보급되어 점차 남자들 사이에서도 하게 됐다.


택견 한국에 태권도와 씨름만 있는 게 아니다

   
▲ 이남준 선수가 위협적인 발질을 날리고 있다.

두 선수가 춤추듯이 스텝을 밟고 손을 흔든다. 춤추는 동작 때문에 택견이 무용 같지만 엄연한 무술이다. 결투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상대방의 등을 바닥에 닿게 하거나 발로 얼굴을 차면 된다. 상대의 옷깃을 잡으면 안 된다는 차이가 있지만, 택견은 씨름을 보는 것과 같이 박진감이 넘친다. 발로 상대의 얼굴을 차서 승리할 때의 쾌감은 태권도를 보는 것 같다. 경기에 소극적으로 임하면 경고를 받아 상대에게 공격권을 한번 줘야 하는 규칙이 있다. 복싱이나 레슬링과 달리 체급의 범위가 넓다. 체급 차이가 나더라도 순발력으로 충분히 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택견은 여러 문헌에서 수박, 수박희, 각희, 비각술로 표기됐다. 택견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놀이에서 서로 겨루는 경기도 있었다. 택견은 기술구조가 공격적이며 적극적이고 격렬하다. 하지만 상대에게 상해를 입히지 않도록 하는 기법과 의복에 손상을 주지 않게 하는 등 다른 사람과의 공존공생을 존중하는 우리의 정서가 배어있다.

택견은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됐으며, 이듬해 창설된 사단법인 대한택견협회의 주도하에 생활 체육으로 전국에 보급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1년 11월 28일, 택견은 세계 무술 가운데 최초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근대 5종 아리스토텔레스가 찬양한 스포츠

   
▲ 수영과 펜싱을 마친 진석현 선수가 종합경기에서 사격을 하고 있다.

근대 5종(modern pentathlon)은 고대 5종 경기에서 파생됐다. 그리스인들은 고대 올림픽대회에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조화를 이룬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 서로 다른 종목을 종합한 고대 5종 경기를 시행하게 됐다. △달리기 △멀리뛰기 △창던지기 △원반던지기 △레슬링으로 구성됐다. 1912년 제5회 올림픽대회에 스포츠로 근대 5종 경기를 채택한 사람은 근대올림픽 창시자인 쿠베르탱이다. 이때 △펜싱 △수영 △승마 △크로스컨트리 △사격 등 5개 종목으로 변경됐다. 각 종목에서 득점한 점수를 합산해 총점으로 순위를 정한다. 다양한 종목을 소화해야 하므로 체력도 중요했다. 이에 힘들어도 팀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서로 격려했다. 힘을 북돋기 위한 관중의 응원도 끊이질 않았다.

펜싱의 경우 풀 리그(Full lea-gue)로 대전한다. 칼이 판독기에 연결된 상대 선수의 옷에 닿으면 자동으로 승패가 갈린다. 수영은 200m를 헤엄쳐야 한다. 승마는 뛰어넘기 장애물 12개를 넘는 400m의 코스를 제한시간 내에 완주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육상과 사격을 함께 진행하는데 이전 3개 경기종목의 종합점수에 따라 출발시각에 차이를 둬 출발한다. 총 3번의 사격이 있어 그 사이 장거리 달리기를 1km씩 총 2km를 뛰어야 한다. 기존 육상과 다른 점은 다음 선수에게 바톤이 아닌 손 터치 방식으로 경기를 이어간다.


복싱 우리의 주먹에 담긴 역사

   
▲ 홍성민 선수의 날카로운 잽이 상대방 머리를 향했다.

복싱은 장갑을 끼고 공격과 방어를 하며 결투하는 투기 종목이다. 결과는 KO가 아니면 심판의 판정으로 승패가 갈린다. 라운드별로 심판들의 점수가 합산돼 결과가 결정된다. 올림픽 복싱은 12라운드인 프로복싱과 달리 3라운드로 진행되며, 3·4위 전을 별도로 진행하지 않는다. 공동 3위로 두 개의 동메달을 수여한다. 전국체전 역시 올림픽 규정을 따랐다. 경기는 치열했다. 마지막 3라운드에서는 코피가 터져도 죽을 힘을 다해 주먹을 날린 선수도 있었다. 경기 중 한 심판이 선수에게 점수를 몰아주면서 패한 선수의 코치가 심판에게 항의하고 소리 지르는 사건도 있었다.

국제복싱이 한국에 유입된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던 1912년이다. 빈곤했던 시절 복싱은 많은 이의 꿈으로 자리 잡았다. 덕분에 60년대에 한국 복싱은 호황기를 맞이한다. 1966년 6월 25일 김기수 선수가 이탈리아 선수를 물리치고 WBA 미들급 타이틀을 획득했다.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세계 정상 도전에 성공했다. 1977년, WBA 주니어페더급 홍수환 선수가 파나마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고전 끝에 챔피언이 됐다. 1982년 11월 13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링에서 WBA 라이트급 타이틀을 놓고 당시 아시안 챔피언이 김득구 선수가 뇌출혈로 사망하면서 공식 복싱 규정이 변하게 되는 아픈 역사도 안고 있다.


댄스 스포츠 아름다움과 즐거움의 경쟁

   
▲ 선수가 손을 흔들며 환호하는 관객들에게 답하고 있다.

결승전을 제외하고는 여러 팀의 선수들이 같은 라틴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마룻바닥에서 다섯 쌍의 남녀가 짝을 지어 춤을 추는 모습이 꼭 무도회장에 온 것 같다. 관객들도 박자에 맞춰 손뼉을 치고 환호하며 호응하는 축제 분위기다. 넓은 마룻바닥을 자유롭게 휘저으며 퀵스텝, 왈츠, 차차차, 삼바 등 10개의 종목을 다양한 음악의 맞춰 춤을 춘다. 선수들도 경쟁하기보단 각자의 순간을 즐겼다.

세계 각 나라에서는 그 나라마다 민속무용이 있으나 볼룸댄스는 전 세계적으로 공통된 도법으로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춤이다. 무도회의 종주국이 영국이기 때문에 볼룸댄스라고 칭했다. 이는 볼룸(Ball room)과 댄스가 합쳐진 말이다. 즉 아주 넓은 장소에서 추는 춤을 의미한다. 오락적이고 사교적인 춤으로써 모던 댄스, 라틴 아메리칸 댄스, 로큰롤, 새보고 등 그 밖의 많은 춤을 포함한다. 댄스 스포츠라는 용어를 맨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1991년이다. 독일에 본부를 두고 있었던 국제아마추어댄스평의회(ICAD)가 경기댄스를 올림픽 종목으로서 승인을 얻기 위한 적합성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볼룸 댄스’라는 명칭보다는 ‘댄스 스포츠’가 적합하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ICAD는 댄스 스포츠가 95년 올림픽 종목으로 잠정 승인을 받은 것을 기점으로 정식 종목이 되기 위해 꾸준한 노력을 해왔다. 댄스 스포츠는 아시안게임에서는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지만, 채점이 주관적이라는 점 때문에 올림픽종목에서는 제외됐다. 2024년 프랑스 올림픽에선 브레이크 댄스를 잠정 채택해서 앞으로 댄스 스포츠가 채택될 가능성은 남아있다.

글·사진_ 손용원 기자 ywson51@uos.ac.kr
이석주 수습기자 s2qkstijrwn@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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